내가 빨리 후계자를 만들어야지 이것참…

오늘 컨디션 완전 빵점이다. 목도 많이 부었고 머리도 지끈지끈 아프고 마디 마디가 쑤신다. 아마도 만 2주간 집에서 놀아서(?) 생긴 몸살이라고나 할까?

집에서 내가 놀일이 없지.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회사 컴퓨터에 remote로 로그인하고 이메일 확인하고 처리할 문제들 검토하고 indecisive한 직원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할때 대신 결정해 준다. 가끔씩 기가막힌 케이스도 많다. 생각이 없는 것인지 생각을 않하는 것지 못하는 건지… creative한 생각이 없고 그냥 주어진 상황에 맞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자기 구역안에서 한다. 책임의식과 주인의식 완전 빵점이다. 내가 왜 이런 것들하고 일을 해야 되는지 좀 기분이 꿀꿀하다.

내가 이번 형식상 휴가에서 느낀점이 한가지 있다. 바로 이것이다. 난 후계자가 없다. 내 일을 대신 맏겨 놓고 내가 발을 쭈욱 뻗고 누울만큼 실력 있고 신뢰가 가고 신용 있는 사람이 없다. 다시 말해 내 주의에는 그냥 평균 70점짜리만 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현실인가.

음참마속이란 말이 있다. 가정에서 마속이 멍청하게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고 산에 진을 쳐서 북벌 1차 시도가 물거품이 됬다. 내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누구에게 맡겼다가 이렇게 막말로 조지면 무슨 불상사가 생기라고. 그리고 그 뒷처리를 어떻게 하라고. 겁이 많은 건지 조심성이 많은 건지. 그리고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장 내외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맏긴다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도 내가 너무나도 잘안다. delegation과 내가 스스로 해야 되는 일… 이 중간점을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인재 물색에 들어가야 된다. 열정적이고 책임감 있고 신중하고 정확하며 실력 있고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하는 그런 인재… 우리 회사에 있나? 어… 나만한 사람이 없네. 혹시 내가 70점짜리고 남들은 다 50점인가? 그러면서 난 스스로 100점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애공 돌아가시겠네.

이제 나도 늙어 간다. 예전 같이 정확하지도 않다. 아니 정확하긴 한테 그냥 좀 게을러져서 옛날 만큼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떨어진것은 맞다. 아마도 가정에 충실해야 된다는 생각에, 아니면 이것을 핑계로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 이런 잡다한 생각이 날 귀찮게 한다. 그냥 따뜻한 콘약 한잔 마시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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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오늘 아침에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서 모자르트에 대한 바이오그라피를 읽어 봤다. 하이든의 친구였고 로코코 양식을 내포한 그리고 베토벤이 고전과 낭만 사이를 이어준 음악가였다면 아마도 모자르트는 바로크와 고전시대를 이어준 다리 역활을 한 음악가이다. 비록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 했다가 탈퇴를 하려는 과정중 암살을 당했다고 소문도 있지만…)

모자르트의 고향은 오스트리아의 짤즈부르크 (Salzburg in Australia) ‘소금으로 만든 성’ 혹은 ‘북쪽의 로마’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아 잠깐. 헨델이 태어난 고향 독일의 Halle 에서도 소금이 많이 난다고 했는데…. 훌륭한 음악가랑 소금이랑 무슨 관계가 있나? 다른 작곡가들의 출생지의 특산물이 무엇인지 자세히 조사를 해볼 필요가 있는지… 아 그리고 모자르트는 커피를 정말 좋아 했다고 한다. 자기가 살던 동네에 이태리 태너 성악가 토마스 셀리라는 운영 했던 카페가 있었는데 커피가 맛이 없다고 해서 모자르트 친히 편지를 써서 항의를 했다는 소문도 있다.

모자르트의 아버지 Leopold는 궁정음악사였다. 그는 violin master였고 작곡가였으며 바이올린 연주법에 대한 중요한 책들을 저술했다. 모자르트에겐 누나가 한명 있었는데 두명다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음악 교육을 일찍 시작했고 모자르트는 3살부터 피아노를 연주 했고 5살때 첫곡을 작곡 했다. 물론 그는 바이올린 연주에도 뛰어 났다고 한다.

직업이 음악가 였던 그의 아버지는 모자르트를 데리고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연주회를 가졌다. 첫 연주회는 모자르트가 6살이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그의 천재적 소질을 보고 오페라를 작곡하길 권유했다. 그의 첫 오페라 작품은 La finta giardiniera 곡이며 이태리 말로 그가 12살때 작곡을 했다. 그리고 Gregorio Allegri가 작곡한 Miserere를 14살때 단 한번 듣고 악보를 배꼈으며 13살때는 궁정음악단의 악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돈을 벌지 못했고 항상 그의 고향 Salzburg는 그의 탤런트를 감당하고 기회를 줄만한 곳이 아니라고 푸념을 늘어 놓았다고 한다. 그가 25살이 되던해에 그는 비숍의 미움을 받아 궁정악단에 탈퇴를 했고 그의 첫사랑은 좋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이런 모자르트는 이태리, 비엔나, 프라하등 유럽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곡을 작곡 했다. 많은 사람들이 평가를 하길 만약 모자르트가 35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지 않았다면 고전시대는 좀더 길었고 다른 작곡가 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그가 천재임은 분명하다. 천재임과 동시에 일찍 음악 교육을 받고 훈련을 통하여 성장 했다. 하지만 헨델은 시대의 흐름과 주어진 기회를 잘 사용하여 성장을 했지만 모자르트는 자신의 재주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고 또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 할수 있는 기회를 그의 인생 전반부에 찾지를 못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음악여행을 오히려 ‘도피성 방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뭐라고 할까 소를 잡는 도끼가 닭을 잡는 도살장에 있는 그런 기분? (사자성어로 우도할계라고 했던가) 이럴때 자신의 재주와 실력 및 가치가 제대로 인정을 받고 활용 되지 못하고 또 이것에 맞는 적절한 댓가를 지불 받지 못한다고 하여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만약 자신의 고향 Salzburg의 비숍과 좋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자기 아버지처럼 궁중음악사로 오랫동안 일했다면 주옥같은 교회음악이 바하와 헨델 만큼 작곡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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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use you are older than me, it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you are wiser than me.

그러니까 나한테 훈계 할려고 들지 말라고 제발… 내가 예전에부터 잘하는 말이다. There is no positive linear correlation between maturity/wisdom and age. 다시 말해 나이 많이 먹는다고 해서 지혜로운 것도 현명해 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본 어른들중 (나보다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을 통털어 애기함)에서 나이 값을 참 못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다. 예를 들어 과거의 산물 혹은 추억에 허우적 거리면서 ‘내가 왕년에’ 혹은 ‘내가 예전엔 말이야’라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가 과거에 이루어 놓은 일들을 꼭 주말의 영화 몇번씩 재방송하면서 욹어 먹는 사람들. 또 나이 먹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일들을 겪어 보았다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몇번 만나지도 애기도 하지 않고 평가하려 드는 사람들. 정말 돌아가시겠네 허억…

예전엔 어른 말씀이면 무조건 들으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았는데 이제는 어른 말도 가려서 들어라고 나한테 주입식 교육중이다. 좀더 정확히 애기하면 나랑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거나 나의 세계관을 이해하거나 나의 장점을 인정해 주고 나의 단점을 보안해 줄수 있는 실력을 갖춘 어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옛날엔 잘 나가다가 지금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 (과거에 실수하여 현재 회복을 못하고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나에게 와서 ‘물질적인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고 애기하면 과연 내가 긍정적으로 받아 들일수가 있는가? 아니 과거에 얻었던 것을 현재까지 유지 못했고 또 이것을 미래에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잃어 버린것들을 다시 찾을 능력이 않된다는 뜻인데 이 상황에서 ‘물질적인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라고 애기하면 이것을 참 치사하고 비굴한 변명이 아닌가?

난 내가 평균 이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남에게 (특히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훈계나 조언등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언을 주기 전에 먼저 얻을 것이 있다. 이것은 신용과 신뢰와 실력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 가끔씩 좋은 투자 상품이 나왔다면서 financial advisor들이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럼 난 먼저 상품 정보를 듣기 전에 그 전화를 건 사람에게 물어본다. 당신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투자용 주택의 숫자는 무었이며 현재 시장 가격은 얼마인가. 부동산 말고 어떤 재산을 가지고 있는가. 이렇게 물어본다. 그리고 나서 내가 가신 재산보다 낳을 경우 난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나보다 낳은 것이 없는데 어찌 당신이 나에게 더 많은 부를 창조하기 위한 조언을 해줄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전화 통하는 정말 짧아진다. 나에게 조언이나 훈계를 하기 위해선 나보다 반드시 낳아야 한다. 나보다 낳은 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점을 나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낳은 점은 과거형태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아직 나에게 존경과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면 난 반드시 반격한다. ‘인생을 그렇게 팍팍하게 사시면 않되요’라는 말에 ‘내가 언제 당신 한테 내 인생 철학관을 평가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정말로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난 이렇게 늙고 싶지 않다. 난 함부로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말하고 싶지 않다. 난 그냥 입 꼭 다물고 있다고 물어보면 대답 할껏이다. 난 누구 같이 마음이 넓지도 않고 동정심도 없고 자선가의 넓은 도량과 마음도 없다. 그냥 예전과 같이 passive aggressive로 그냥 간다. If anyone carelessly poke me, please be aware that I will strike you hard at once. 그러니까 그냥 제발 나 좀 내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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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Fredrick Handel (1685 – 1759)

어제 밤 심심해서 오래간만에 예전에 구입한 Classical Destinations DVD를 시청 했다. 유명한 작곡가들의 출생지와 활동한 지역들을 음악과 장엄한 배경과 함께 설명을 하는 아주 유익한 드라마이다. 무엇보다 재미 있는 것을 이것을 시청함으로 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음악가의 배경에 대해서 배울수가 있다. 어젯밤에는 Classical Destination II의 첫번째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독일 출생이지만 영국에서 활동을 한 바로크 시대의 거장 조지 프레드릭 헨델이다. (독일말로 하면 게으로그 프리드히크 한델이라고 하던가?)

헨델이 태어난 고향의 독일의 한 공장 Halle이다. 이곳은 소금을 다량 생산하는 곳으로 지금은 화학약품 생산에 가장 활발한 곳이다.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헨델의 고향과 모자르트의 고향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금’이다. 모자르트가 태어난 곳은 Saltzburg (한국 말로 ‘짤쯔브르크’) in Austria, 번역을 하면 ‘소금으로 만든 성’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세계 최고의 지휘자 Herbert von Karajan도 Saltzburg에서 태어났다.

헨델은 성장하면서 오르간 연주를 잘 했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 있는 사실을 발견 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하는 헨델이 태어 나고 나서 1달 후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네에서 태어 났고, 바하가 먼저 ‘Our Dear Lady’라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자로 오디션을 보았는데 떨어 졌고 헨델은 합격 했다고 한다. 아 그리고 이 교회에서 마틴 루터가 설교를 했다고 한다.

헨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서 법대에 입학 했다고 한다. 어… 음악가 중에서 법을 공부한 사람이 두명이 갑자기 생각난다. 하나는 낭만시대의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정식으로 음악, 미술, 역사, 지리, 법, 그리고 정치를 제대로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 헨델이지만 그는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17살이 되던 해에 그는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지만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계약직으로 1년동안 반주자로 생활 했는데 제계약에 성사가 않된 것으로 안다) 21살이 되던 해에 이태리로 여행을 떠나 여기서 오페라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그후 그는 영국의 런던으로 가서 정착을 하면서 첫(?) 오페라를 작곡한다 – 이 곡의 이름이 Almira인가 Leonardo인가 잘 기억이 않나는데 어쨌든 이 곳을 작곡하는데 헨델은 약 14일을 소모 했으며 첫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영국 귀족들의 사랑을 받아 연간 200파운드의 연금을 죽을때까지 받게 된다. 뭐라고 할까… 이 시기에 영국 사람들은 오페라에 대해 굉장한 환상을 가졌고 그리고 이태리에서 오페라의 기법을 배워서 영국에 도입 시킨 헨델이 환대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였다. (막말로 타이밍이 정말 죽였다)

오페라를 작곡하고 난 후에 Water Music를 작곡 했는데 영국 귀족들의 사랑을 또 한층 받아 연금이 200파운드에서 400파운드로 인상 됬으며 42세가 되는데 해에 그는 영국 시민권을 획드하게 된다. 아마가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헨델은 영국 음악가로 강조를 하고 독일 사람들은 독일 작곡가로 간주를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또 재미 있는 애기가 있다. 오페라의 흥행을 위해서 헨델은 소프라노를 이태리에서 수입(?)을 한다. 여기서 Her Majesty Theatre 상임 소프라노와 (기록상 그녀는 외모는 떨어졌지만 헨델의 vocal writing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소화를 했다고 한다) 마찰이 생겨서 공연중에 두 소프라노가 싸우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이 공연을 관람하던 공주가 이 장면을 보면서 헨델의 인지도와 인기도는 급격하게 하락하게 된다. 아마 이 문제를 계기로 헨델은 오페라 보다는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고 여기서 세계의 대작 ‘메시아’가 단 3주만에 작곡되며 56세가 되던해서 처음 런던에 연주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나 헨델은 메시아의 첫 공연을 런던에서 마친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으로 간다. 이때 더블린은 음악이 런던 만큼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연극/희극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헨델의 음악은 더블린 사람들에게 대환영이였다. 여기서 헨델의 메시야 오라토리오가 두번째로 연주가 되는데 각각 다른 교회의 성가대를 모아 연습을 했는데 어느 교회에서 연주회를 가질것이냐는 의견 충돌을 현명하게 피하기 위해 헨델은 중립적인 장소인 Smock Alley라는 곳에서 연주회를 갔는다. 여기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에 한번 감탄한다.

헨델의 공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을 통해서 얻은 모든 수익금을 그는 병원에 기부 했다. 그가 후원한 첫 병원의 이름은 Mercer’s Hospital이며 이곳에서면 매년 마다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한다. 그의 공적을 높게 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델은 자신의 곡을 모든 병원과 교회에 기증을 했다. 자신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 저작권을 지키면서 더 많은 돈을 벌릴수 있었던 그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맞지 않는 선택을 한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구제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병원에 그는 기부했다.

후의 헨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영국 시민들의 귀감이 되어 King George II는 메시아 오라토리오의 할렐루야 합창 부분에선 왕을 포함한 모든 영국 시민들이 자리에 일어나게 법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1753년에 그는 실명을 했고 1759년에 그는 자기 침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메시야 오라토리오는 런던의 뮤직이라고 불려지고 그느 훌륭한고 실신한 기독교인으로 기록 됬고 기록 되었다. 헨델의 죽은후 100년후에서야 또 하나의 음악가를 탄생한다. 에드워드 엘가 그리고 벤자민 브리튼… 아마도 영국은 많은 음악가가 나오지 않아서 헨델을 영국인이라고 더 강하게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크크크. 어쨋든…. 헨델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경영인의 자질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하다. 음악 그리고 병원….. 갑자기 바로크 음악이 좋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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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Fredrick Handel (1685 – 1759)

어제 밤 심심해서 오래간만에 예전에 구입한 Classical Destinations DVD를 시청 했다. 유명한 작곡가들의 출생지와 활동한 지역들을 음악과 장엄한 배경과 함께 설명을 하는 아주 유익한 드라마이다. 무엇보다 재미 있는 것을 이것을 시청함으로 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음악가의 배경에 대해서 배울수가 있다. 어젯밤에는 Classical Destination II의 첫번째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독일 출생이지만 영국에서 활동을 한 바로크 시대의 거장 조지 프레드릭 헨델이다. (독일말로 하면 게으로그 프리드히크 한델이라고 하던가?)

헨델이 태어난 고향의 독일의 한 공장 Halle이다. 이곳은 소금을 다량 생산하는 곳으로 지금은 화학약품 생산에 가장 활발한 곳이다.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헨델의 고향과 모자르트의 고향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금’이다. 모자르트가 태어난 곳은 Saltzburg (한국 말로 ‘짤쯔브르크’) in Austria, 번역을 하면 ‘소금으로 만든 성’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세계 최고의 지휘자 Herbert von Karajan도 Saltzburg에서 태어났다.

헨델은 성장하면서 오르간 연주를 잘 했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 있는 사실을 발견 했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하는 헨델이 태어 나고 나서 1달 후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네에서 태어 났고, 바하가 먼저 ‘Our Dear Lady’라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자로 오디션을 보았는데 떨어 졌고 헨델은 합격 했다고 한다. 아 그리고 이 교회에서 마틴 루터가 설교를 했다고 한다.

헨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서 법대에 입학 했다고 한다. 어… 음악가 중에서 법을 공부한 사람이 두명이 갑자기 생각난다. 하나는 낭만시대의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은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이다. (멘델스존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정식으로 음악, 미술, 역사, 지리, 법, 그리고 정치를 제대로 배웠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 헨델이지만 그는 음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17살이 되던 해에 그는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지만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계약직으로 1년동안 반주자로 생활 했는데 제계약에 성사가 않된 것으로 안다) 21살이 되던 해에 이태리로 여행을 떠나 여기서 오페라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그후 그는 영국의 런던으로 가서 정착을 하면서 첫(?) 오페라를 작곡한다 – 이 곡의 이름이 Almira인가 Leonardo인가 잘 기억이 않나는데 어쨌든 이 곳을 작곡하는데 헨델은 약 14일을 소모 했으며 첫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영국 귀족들의 사랑을 받아 연간 200파운드의 연금을 죽을때까지 받게 된다. 뭐라고 할까… 이 시기에 영국 사람들은 오페라에 대해 굉장한 환상을 가졌고 그리고 이태리에서 오페라의 기법을 배워서 영국에 도입 시킨 헨델이 환대를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였다. (막말로 타이밍이 정말 죽였다)

오페라를 작곡하고 난 후에 Water Music를 작곡 했는데 영국 귀족들의 사랑을 또 한층 받아 연금이 200파운드에서 400파운드로 인상 됬으며 42세가 되는데 해에 그는 영국 시민권을 획드하게 된다. 아마가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헨델은 영국 음악가로 강조를 하고 독일 사람들은 독일 작곡가로 간주를 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또 재미 있는 애기가 있다. 오페라의 흥행을 위해서 헨델은 소프라노를 이태리에서 수입(?)을 한다. 여기서 Her Majesty Theatre 상임 소프라노와 (기록상 그녀는 외모는 떨어졌지만 헨델의 vocal writing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소화를 했다고 한다) 마찰이 생겨서 공연중에 두 소프라노가 싸우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이 공연을 관람하던 공주가 이 장면을 보면서 헨델의 인지도와 인기도는 급격하게 하락하게 된다. 아마 이 문제를 계기로 헨델은 오페라 보다는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고 여기서 세계의 대작 ‘메시아’가 단 3주만에 작곡되며 56세가 되던해서 처음 런던에 연주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나 헨델은 메시아의 첫 공연을 런던에서 마친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으로 간다. 이때 더블린은 음악이 런던 만큼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연극/희극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헨델의 음악은 더블린 사람들에게 대환영이였다. 여기서 헨델의 메시야 오라토리오가 두번째로 연주가 되는데 각각 다른 교회의 성가대를 모아 연습을 했는데 어느 교회에서 연주회를 가질것이냐는 의견 충돌을 현명하게 피하기 위해 헨델은 중립적인 장소인 Smock Alley라는 곳에서 연주회를 갔는다. 여기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에 한번 감탄한다.

헨델의 공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을 통해서 얻은 모든 수익금을 그는 병원에 기부 했다. 그가 후원한 첫 병원의 이름은 Mercer’s Hospital이며 이곳에서면 매년 마다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한다. 그의 공적을 높게 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델은 자신의 곡을 모든 병원과 교회에 기증을 했다. 자신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 저작권을 지키면서 더 많은 돈을 벌릴수 있었던 그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맞지 않는 선택을 한것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구제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병원에 그는 기부했다.

후의 헨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영국 시민들의 귀감이 되어 King George II는 메시아 오라토리오의 할렐루야 합창 부분에선 왕을 포함한 모든 영국 시민들이 자리에 일어나게 법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1753년에 그는 실명을 했고 1759년에 그는 자기 침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메시야 오라토리오는 런던의 뮤직이라고 불려지고 그느 훌륭한고 실신한 기독교인으로 기록 됬고 기록 되었다. 헨델의 죽은후 100년후에서야 또 하나의 음악가를 탄생한다. 에드워드 엘가 그리고 벤자민 브리튼… 아마도 영국은 많은 음악가가 나오지 않아서 헨델을 영국인이라고 더 강하게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크크크. 어쨋든…. 헨델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경영인의 자질과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 분명하다. 음악 그리고 병원….. 갑자기 바로크 음악이 좋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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