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난 그렇것 절대로 믿지 않는다.

조조가 한 말이다 – ‘계획은 사람이 세우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고. 참으로 멋진 명언 같지만 동시에 나에겐 참 구실 좋은 핑계이다. 자신이 뜻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이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는 추상적이면서 시적인 핑계… 그러나 이 말이 지난주에는 좀 다르게 해석 되었다.

조조가 사마의의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 자기 밑에 두려 했다고 한다. 조조의 부름에 사마의는 쉽게 응하지 않고 뜸을 드린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그의 밑에 들어간다. 하지만 조조는 그에게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마음속에 깊이 숨기고 있는 그의 야망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에 버금가는 재주를 가진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때를 기다린다. 재사는 재능으로 망한다는 말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주부 양수 같이 재주를 뽑내지 않고 낮은 곳에서 기회를 엳본다. 그가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바로 조조 아래의 있는 자식들을 하나 하나 잘 살핀후에 조조의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을 찾는다. 그가 바로 조비이다. 사마의는 조조 아래 있는 동안에 사마의와 좋은 유대관계를 가진다. 조식에게는 그 뒤를 봐주는 권모술수가 뛰어난 스승 양수가 있었고, 조비에게는 공식적인 스승은 아니되 좋은 벗과 선생으로써 역활을 맏아 가면서 사마의는 서서히 신임과 신뢰를 조비에게서 얻었다. 사마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주를 들어내고 세상을 질주하기 위해선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자기의 주인 조조가 세력과 위치가 크다는 것을. 이 큰 장벽을 사마의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지 않고 자연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극복했다. 이것이 바로 ‘나이’이다. 조조는 만년두통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만약 사마의가 조조가 장수를 하길 바랬다면 화타가 조조를 만나기전에 미리 귀뜸을 해두고 해야 될 말과 해야 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르쳐 주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인의 죽음이 바로 사마의 자신에게는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니까.

결과는 이러하다. 최후의 승자는 바로 사마의다. 사마의가 조조 아래에 일찍 들어 갔다면 제갈량과 전면전을 일찍 실행 했을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재주를 두려워하는 조조는 사마의에게 병권을 맡기지 않았을것이다. 그래서 사마의는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이 된후에 대도독이 되어서 제갈량과 맞선다. 다섯번의 북벌을 시도한 제갈량을 방어만하고 제갈량을 과로사로 숨지게 한 그는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긴다’라는 전략의 대가임이 분명하다. 후에 조비의 신임을 더욱더 얻게 된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그는 조씨 가문을 4대째 섬긴후에 구테타를 일으켜 후에 자기의 후손들이 중국을 통일하도록 기반을 만든다. 진정한 영웅은 때를 기다린다. 그 기다린 때가 오면 영웅은 날개를 편다. 천둥번개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입에 여의주를 물고 말이다.

드디어 지난주에는 조조가 한 말에 동의를 하게 됬다 – 계획은 사람이 하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는 것을. 지난주에 난 사마의의 기분을 드디어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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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의 대가 – 베를로이즈

오늘 아침에 FM 102.5를 들으면서 출근을 했다. 내 사랑스런 Audi A4가 오른쪽 아래를 부상 입는 바람에 나의 정든 Holden Astra를 끌고 갔다. 그런데 왠지 더 운전하기가 쉽고 친근감이 들었다. 구관이 명관인가… 아 ipod랑 연결이 되지 않아 혀를 끌끌 차면서 할수 없이 102.5을 틀었다. 아침부터 짜증나게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mc를 보는데.. 아 진짜 열받네…. 말을 왜 이렇게 더듬어!

회사에 거의다 왔네. 프랑스의 작곡가 마스네가 작곡한 행진곡이였다. 발랄하고 재미 있는 곡이였다. 그런데 해설자가 애길 하길 이 음악엔 브루주아의 성격이 감미가 된 곡이라고. 이말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 머리속에 떠올린 작곡가는 바로 관현악의 역명가 베를리오즈. 그가 없었다면 리차드 바그너 그리고 거스타브 말러의 화려한 관현악 작품들이 나오는 것이 불가능 했을지 모른다. 기존의 관현악 주법, 고정관겸을 완전하게 무너뜨린 선구자. 그의 혁신적인 관혁악 연주법과 작품들중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환상 교향곡’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일생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다.

아 브루조아 라는 단어가 나오면 생각나는 작곡가는 바로 멘델스죤. 좋은 환경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고생 없이 역경 없이 그냥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밣고 자란 작곡가. 뭐라고 할까 그의 음악은 2% 부족? 특히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은 그냥 너무 쉽게 만들어진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베토벤 같이 인간의 고내가 깊게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많아서 그냥 가끔식은… 아 왜이렇게 곡들이 밝아? 짜증나네 라는 말을 내뱉은 적이 많다. 어쨋든 고생 않하고 곱게 성장한 음악가들은 그냥 싫다. 왜? 난 자수성가 타입을 좋아하니까. 120개의 교향곡을 작곡 했지만 별로 신금을 울리는 곡이 없는 하이든 – 사람들은 (특히 기독교인들) 그가 천지창조를 초연하고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믿지만 사실 프리메이슨에 소속된 사람으로 종교계와 정치계의 사람들의 힘을 얻어 명성을 얻은 음악인이다. 첫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해서 37년을 고민한 브람스, 법대 재학중이였지만 음악가가 된 차이코프스키. 베를로이즈는 집안 살림이 어려워 의대로 진학을 해서 쓰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려 했으며 도중 음악인을 걷게 되면 피아노도 작곡도 음악 이론도 스스로 늦게 독학으로 끝낸 사람이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자수성가 타입. 최고다.

다시 베를로이즈로 돌아간다. 난 아직 그의 음악에 대한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 교육을 어렸을때부터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고, 또 기존의 관혁안 주법을 깨기 위한 혁신적인 시도 – 다양한 악기 편성과 연주법을 사용하여 두터운 음향 층을 형성하려는 그의 노력…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 그냥 속이 쓰리고 아쉬울뿐이다.

아마도 내가 지금 베를로이즈와 같은 심정일것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약에 힘이 필요한데 꼭 나 혼자인것 같은 외로움 그리고 사람들의 적대감에서 오는 고독함이 그냥 내 어깨를 움치리게 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을 바꿀려는 노력도 시도도 하고 싶지 않다. 난 그냥 내가 세운 목표대로 뚜벅뚜벅 전진할 것이다. 남의 기대를 초월하는 것이 그리고 초월함으로 얻어지는 파생 효과를 즐겼지만 이젠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하고 싶다. 남은 나의 혁신적인 시도가 이해가 않되고 실현 불가능이라 할지 모른다. 이럴때 의기소침하지 말고 나한테 속삭인데 – ‘너 같이 싸가지 없는 놈이 언제부터 남의 눈 의식하고 그랬냐? 한가하냐? 뇌가 아주 서정적이지 요즈음?’ 베를로이즈도 독학으로 음악가가 됬다. 그럼, 난 왜 않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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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업무 분담…..

그런데 믿고 맏길 놈/년이 있어야 하지. 요즘엔 그냥 한숨만이 나올 뿐이다.

내가 너무 많을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난 한가지를 가르쳐 주면 4가지를 능동적인 배우고 습득하여 총 터득한 5가지를 응용하여 10가지의 것을 깨우치는 인재를 찾고 있다. 총명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재주를 믿고 지도자에게 들이데지 않으며 알면서도 가끔 모르는척하면서 윗사람에 자신의 아둔한 면을 간혹 보여줌으로 해서 지도자의 위상과 권한을 돋보이게 하며 윗사람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주를 먼저 들어 내지 않고 사용 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인재가 필요하다. 깔끔하고 준수한 외모, 완벽한 매너와 교양과 화술 및 처세술을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같이 흘러가는 세계관이나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세상을 역류하려는 패기와 용기 그리고 포부를 가진 그런 인재를 내 옆에 두고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위에 나열한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 딱 한명 밖에 없다는 것은 –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재상은 세사에 친숙하지 않고 아랫 사람들에게 이런 일들을 맞기며 자기는 높고 넓은 곳을 바라보며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인재 양성과 기술 계발 그리고 긍정적 동기부여 및 지원 사격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두가지를 다하고 있다. 목표도 세우고 계획안도 만들고 지도도 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해야 될 업무 들을 내가 스스로 하면서 그들과 같이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들어야 될 짐들을 내가 들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낙오 될때 도망 갈까 힘들어 할까라는 아주 센티멘탈한 감정이 빠져서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이러면서 겉으로는 터미네이터 같은 강인함과 완고함 그리고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을 금치 못한다. 다시 말해 나도 알고 보면 너무나 평범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7년 6개월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 지난 2년 6개월은 좀 낳아졌지만 더 이상 이렇게 할순 없다. 집에 오면 나도 이제 같이 돌보아야 될 가정이 있다. 그리고 내 건강도 더 돌보아야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더 듣고 싶고 피아노도 더 치고 싶다. 애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공부도 가르치고 인성교육에 힘써야 될 때이다. 그런데 난 이런 것들, 집안인, 가족들은 위한 일들에 점점 소홀에 진다. ‘충신과 효자는 공존하지 못한다’라는 중국 속담을 방패로 삼아 난 공적인 업무 때문에 사적인 삶에 관심을 덜 둔다. 정확히 따지고 보면 내가 국가의 생존과 명예를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중소기업의 간부로써 남 좋은 일만 하고 있는데 이런 내가 과연 얻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제 점검해야 된다.

2012년 2월달에는 효과적인 업무 분담에 들어갈 것이다. 난 일당백이다. 난 현재 백명의 평범한 직원을 해야 될 업무를 맏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것인가? 100명의 직원을 추가로 뽑을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자동화 시켜서 기복이 심하고 실수가 많은 인간에게 업무를 맏기지 않고 컴퓨터가 맏도록 할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컴퓨터로 자동화를 시키기를 위해서는 프로그램머가 필요한데 그도 나랑 현재 비슷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 진퇴양난이란 표현이 아주 적합할 것이다. 또 열이 받는다. 어떻게 하면 이 과제를 현명하게 극복할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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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impossible to make everyone like me……

therefore it would be prudent to start with an assumption of ‘I hate everyone equally’. With this assumption at least it would make my life a lot easier to pick the ones that ‘not hate so much’.

According to my memory I do not recall to hate anyone with a passion (except my father) till now – because I have learnt a way of strategically avoiding such situation by simply ‘cease associating with the ones whom are considered incompatible’. Some may argue that it is technically impossible to do so but I personally have found it very simple – how? Just ignoring one’s very existence. In other words they don’t exist in my life.

I have been hearing this crap too much till now – ‘Keep your friends close and keep your enemies closer’ or ‘It is easy to make an enemy and more difficult make a friend’. Well, obviously everyone has their own interpretation of this abstract noun ‘friend’ as everyone has their one definition in accordance of one’s own convenience / benefit / advantage. In reality ‘friend’ is an associate who keeps a good balance of ‘give & take’. Hang on a second – I do recall old one saying something like the word ‘friend’ always tags the element of ‘unconditional sacrifice’. However, does this element truly and unequivocally have any value in our post-modern world? The answer is obviously ‘no’.

The principle in post-modern world is rather too clear – if you like it, keep it otherwise spit it out. There is no such thing in terms of valuing / cherishing what happened in the past (e.g. good memories). People now tend to only acknowledge one’s wrong doings – they never forget and hence never forgive. Bad memories build an indestructible wall between people which distorts the harmony and peace among people. In conclusion the true meaning of ‘friend’ hence ‘friendship’ is long gone and doesn’t exist any more.

Perhaps I knew that this was coming – after all there is no such thing as ‘friend’ who understands the value of ‘unconditional sacrifice’ and has the courage to exercise when required. People do the right things when it is easy for them to be righteous and when there is a sufficient acknowledgement and reward. In other words ‘sacrifice’ is no longer one way but two ways – there must be an adequate return.

There was the time when I believed ‘utilitarianism’ does exist for good but in fact it cannot exist hence it is invalid to believe in it. There is absolutely no way of keeping everyone happy. Perhaps I knew this too early when I was young. When there is darkness, there is light. When there is happiness, there is unhappiness. Life is all about keeping a good balance – there are people who admire you and respect you, and there are people who hates you and despise you. My conclusion is rather too simplistic here – I neither make everyone like me nor hate me. What do I next? I exercise my own free will to associate with the ones whom I like to associate with at my discretion. What is the minimum criteria for this? A silly question I must say – one who values me and one whom I also value in return – Have we already forgotten about the ultimate reality of ‘friend/friendship’ is nothing but an abstract noun that cannot be defined any more as no one understands the value of ‘sacrifice’ any more and no one has a courage to exercise it? When someone asks me ‘Do you have a friend?’ and my answer is obviously ‘no’. If anyone answers this question is ‘yes’, then I would say that either one is a complete foolish moron or a pretentious idealist who dreams for something doesn’t exist any more.

Going to back where I started – It is neither impossible to make everyone like me nor make everyone hate me. I continue doing what I do – Retaining a good relationship as long as I can possibly can with ones who respect my value and with ones whom I respect their value. I have no one around me who would sacrifice his/her life to save mine and vice versa. This is a brutal reality which everyone does not want to admit but I do. My life is too short and too valuable to worry about the ones who do not like me. In fact it is logically impossible to defend myself against their hatred because they add no value to my life. If there is no value, one doesn’t exist. If not exist, then I simply ignore. My life goes on – no time to waste with something doesn’t ex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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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말을 듣고 꿈을 포기 했다면 성공할 자격이 애초에 없었다..

어제 읽었던 ‘바보 빅터’에 다온 글귀이다. 책의 두께가 얇고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읽을수 있었다. 몸이 않좋아 낮잠을 잔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워서 아주 여유롭게 오래간만에 책을 볼수 있었다. 대부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그중 화장실 가는 동안) 책을 읽는데 아주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서 첫장을 펴서 마지막 장을 넘길수 있었던 기회가 최근엔 그리 많지가 않았다. 어쨋든 독서의 재미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책의 내용은 17년 동안 바보로 살아온 Mensa International의 회장 빅터 세리브리아코프에 대한 내용을 각색하여 소설로 만든 것이다. 너무나 뻔한 뻔짜의 애기였다. 나에겐 더 이상 새롭고 감동을 주거나 혁신적인 사상을 깨우쳐 주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은 아니였다. 그러나 한번 읽어봄으로써 잃어 버렸던 꿈 혹은 흔들렸던 나의 꿈을 제정비 할수 좋은 동기부여를 준 책이였음은 분명하다.

‘남의 말을 듣고 꿈을 포기 했다면 성공할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다’라는 대목을 읽었을때 예전에 내가 가졌던 생각을 서슴없이 적어 본다. 누군가 어렸을때 나에게 ‘넌 무엇을 하기 힘들다’라는 말을 들었을때 나의 반응은 항상 이러 했다 ‘네가 나에게 한 그 말과 평가가 잘못된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긴 너에게 언젠가 복수하겠다’였다. 뭐라고 할까 나의 뜻과 기대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그리고 공격적으로 반격을 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disagreement는 나에게 challenge를 한다는 뜻으로 항상 해석을 했으며 나에게 도전을 한다는 것은 나의 가치를 무시한다고 항상 받아 들였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상대편의 말에 대한 타당성과 의도를 논리적으로 분석한 후에 용납하거나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34년의 세월에서 그 어떤 누구가 나에게 나의 인생철학과 세계관 그리고 방법론에 의의를 제기하면 난 이것을 용납한적이 없다. 단 나에게 이런 말을 할수 있는 자격과 위치에 있다라고 내가 인정한 사람은 당연히 심사숙고 한후에 받아 들인다.

요즘에 이런 경우를 종종 겪은 기억이 난다. 나에게 ‘이렇게 살면 않된다’라는 식으로 훈계를 하려는 나의 먹은 늙은이들이 내 주의에 있다는 것을. 난 나보다 어린자들 아직 많은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은 자들에게 이런 애기를 항상한다. ‘연륜에서 얻어지는 경험은 돈을 주고 살수는 없지만 어른들이 말이 항상 100%맞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어른들이 무슨 애기를 하는지 듣기전에 그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가졌으며 어떤 학식과 어느 사회적 위치에 현재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 ‘자신이 존경하고 신용하는 어른의 조언을 받아 듣고 고려는 하되 그것을 바탕으로 절대로 결정을 하면 않된다’; ‘만약 나를 잘 알지고 못하고 내가 신용하지도 존경하지고 자격미달은 어른이 내 꿈과 어긋나는 말, 내 세계관과 인생관과 상반되는 말을 할 경우 그 말은 듣지도 말고 그 사람과 앞으로 상종도 하면 않된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자신의 꿈을 사람들과 함부로 공유하지 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 꿈을 이해 할수 있는 사람들과 꿈을 나눈다. 그들이 내 꿈의 현실 가능성을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나에게 애기한다 – ‘난 당신의 꿈을 당신이 꼭 이루길 진심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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