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고 싶은데 바꿀 힘이 없을땐….

그냥 닥치고 하던 일이나 계속 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사람들과 만나면 이런 저런 애기를 듣게 된다. 그중 대부분이 푸념이다. 뭐라고 할까… 현재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에 불만족스러움을 표현하는 애기. 그런데 이런 애기의 결론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말해 푸념의 효율성을 한번 따져보면 바로…. 영양가 빵점이다. 왜냐하면 푸념이란 자기 자신이 놓여진 환경을 개선 할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불만을 나열하는 작업을 애기한다. 이렇게 푸념을 늘어 놓는 순간 자신에게 놓여진 상황은 스스로 자연적으로 마법적으로 기저적으로 절대 개선 되지 않는다. 요행에 의한 승리가 없고 노력 없인 성공하지 못하듯이 불평불만은 아무것도 바꿀수 있는 힘이 없다. 이것을 보고 난 항상 이렇게 표현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의 비굴한 절규’라고.

나도 내가 놓여 있는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가 있다. 특히 사회 생활 할때는 더욱더 그렇다. 만약 이럴때 마다 푸념을 들으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현재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냉정하고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상태 분석을 한 뒤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렇게 한없이 불평 불만을 늘어 놓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동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난 ‘동정’ 받는 것을 싫어한다. 동정은 긍정적인 동기 부여와 회복 그리고 용기를 준다고들 하지만 이 이상의 효과는 없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본다. IELTS 시험을 7번 떨어진 사람이 있다. 그는 매번 떨어질때마다 주의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았다. ‘운이 없었다’ 혹은 ‘다음에 잘 될것이다’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도하게 한다. 하지만 동정은 여기서 정작 IELTS 시험을 왜 계속해서 떨어지에 대한 ‘방법론’을 검토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계속 맨땅에 해딩을 하는 격으로 계속 똑 같은 방법으로 재시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매 결과는 똑 같을 것이고 7번 시험에 떨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럼 동정 말고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constructive criticism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constructive criticism을 마치 ‘조롱’처럼 늦끼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방어적 태세에서 나온 반응이다. 이런 반응이 나올때 사람은 감정적이 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때 무모한 도전 의식이 생기거나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비판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는 않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 같은 실수를 미래에 반복하지 않을수 있다면 constructive criticism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잠시 흘러 갔따. 바꾸고 싶다면 바꿀수 있는 힘과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현재 상태에 승복하고 그 뜻을 따르며 힘을 기른후에 훗날에 기회를 엿본다. 지금 바꿀수 있는 힘이 없음에 한탄치 말고 언제 어떻게 바꿀것인지 미리 계호기하고 준비를 해야한다. 이렇게 애기한 나는 과연 무엇을 바꾸고 싶은 것일까….. 나의 취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고 싶을까? 바꿀수 없는데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기 보다는 급하게 바꾸어야 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을 하는 것이 상책인데… 바꿀것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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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정책…. 녹색탈을 쓴 자본주의 또 다른 political stunt

얼마전에 필립 코틀러가 쓴 책 ‘카오틱스’를 읽으면서 세계 기업들이 선호하는 친환경 정책에 대한 기사를 몇가지 찾아 봤다. 요즈음 길거리에 많이 보이는 hybrid (전기와 휘발류)에 연비률과 디젤을 비교하는 기사를 읽다가 우연치 않게 flex라는 자동차를 발견 했다. 바로 휘발류나 에탄올로 운행이 가능한 자동차였다.

이 세상에서 flex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판매가 된 나라가 브라질이다. 브라질 시장에 85%가 바로 이 flex 자동차라고 한다. 100% 에탄올로 운행이 가능한 이 자동차는 이산화탄소를 휘발유에 비교해서 거의 배출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친환경’ 자동차로 시장에 알려졌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녹색탈을 쓴 자본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술수’라고 했다. 좀더 찾아 봤고 숨겨진 비밀을 발견해 냈다. 그 비밀은 ‘옥수수’였다.

Flex 자동차에 사용되는 에탄올을 ‘바이오 연료’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연료는 옥수수에서 추출 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옥수수에서 바이오 연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 되는 이산화탄소양이 휘발유에서 발생 되는 이산화탄소양과 거의 맞먹든다고 한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을 막기 위해서 이산화탄소 생산양을 줄이는 것이 목표인 친환경 정책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옥수수 값의 폭등이다. 감자나 옥수수는 밀과 쌀을 대처하는 양식으로 사람들에게 공급 되어졌다. 그런데 옥수수를 일반 시장에 소비용으로 생산 및 납품을 하는 것 보다, 바이오 연료 공장에 공급하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때문에, 옥수수의 공급률 하락에 의한 희소가치가 높아짐으로 옥수수 값이 폭등을 해서 소비자에게 불의익을 가져다 준 것이다.

역시 경제와 경영에서 100% absolute는 없다. 완벽한 진리도 대응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냐는 것이다. 이렇게 애기하면서 내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파노라마 같이 순간 지나 갔다. 삶의 어느 부분에 무엇에 밸런스를 맞추어야 되는지 순간 고민이 된다. 나도 내 삶에 ‘바이오 연료’ 창출을 위한 명분으로 어떤 정치석 술수를 쓰고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지만 고치기가 힘들다. 그만큼 때가 많이 뭍었고 다시 순수해지기에는 너무나도 많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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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면 한국 음식만을 좋아하라고????

아마도 자기가 한국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라는 직업 때문에 그리고 이것으로 파생된 자부심과 노파심에 의해서, 내가 정통 프랑스 요리와 일본 요리를 좋아하는 사실이 꼴도 보기 싫어서 이렇게 나에게 애기를 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말한 것중에 ‘한국 요리가 세계 시장에 진출은 했지만 프랑스와 일본 요리와 같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 못한 이유는 바로 와인과의 부적절한 조화와 반찬 개념의 음식 그리고 요리간의 조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발끈 했을수도 있다. 나의 와인과 음식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자격조건을 들먹인 그에게 내가 과연 반격하지 않았을까? 당연히 했지.

조선 시대의 허균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바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만든 작가이다. 그는 신분 때문에 주류 사회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고 이런 권력소유에 대한 갈망과 출세욕을 먹을것으로 대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허균은 조선시대 최초의 음식 칼럼니스트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허균의 사촌을 불법으로 과거에 합격 시켰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는 유배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허균은 이때 새우와 게가 많이 만다는 이유로 전라도 익산으로 유배지로 선택 했다고 한다. 여기서 허균은 자신이 먹어본 산해진미의 맛을 떠올리면서 집필한 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촉의 음식품평서 ‘도문대작’이다. 이 책에선 94종의 조선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 음식을 소개한다 (내가 여기서 기억하는 것은 단 한가지 바로 여주의 칼국수 밖에 없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조선 최초의 음식 품평서를 집필한 작가의 이름도 모르고 읽어 본적도 없고 고국의 94가자의 명품 토산물과 별미 음식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의 나라 음식이 한국 요리 보다 못하다고 쉽고 가볍게 평가를 할수 있을까? 난 프랑스 요리와 일본 요리가 한국 요리보다 월뜽히 뛰어나다라고 말한적이 없다. 난 세계 시장의 관점으로 봤을때 한국 요리가 다른 나라 요리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 취약점을 객관적으로 말한 것 뿐이다. 각 나라의 음식은 각 나라의 고유 정통 양식과 문화를 표출한다. 그리고 난 이것을 존경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한국인이니 한국 음식만을 좋아하라고 강압적으로 맹목적으로 요구를 하는 것은 용납이 않된다. 뿌리를 알고 역사를 알아야 전통성과 정통성을 주장 할수 있는 것이다. 허균도 모르면서 무슨 나에게 충고를…. 무식한 것인지 용감한 것인지 아니면 무식해서 용감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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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음악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전 자칭 성악을 전공 했다는 (친분이 없는) 전도사와 잠시 애기를 했다. 애기를 하던 중에 요즘에 즐겨 듣는 이루마씨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애기가 나왔는데 정색을 하면서 나에게 훈계조로 기독교인이 이런 음악을 듣는 것은 용납이 않된다로 했다. 얼씨구?

그러면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애기하면서 인상주의 음악을 들먹이면서 나에게 설교를 시작하는데 눈을 감고 지긋이 듣다가 3가지 질문을 다음과 같이 했다.

첫째, 뉴에이지 음악에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깔려 있다고 하셨는데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서양의 철학자와 염세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이름을 말해 보십시요.

둘째, 뉴에이지 음악이 인상주의에서 파생 되었다고 하셨는데,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 두명의 이름을 말해 보십시요. 그리고 이때 프랑스의 화성악이 발전 됬는데 이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시지요.

셋째, 뉴에이지 음악의 고요함을 통한 명상적인 개념에 집중을 하셨는데, 고요함을 기준으로 삼으시면 쇼팽의 녹턴은 다 뉴에이지 음악으로 속하지 않고 후기 낭만에 속하죠? 피아노 협주곡의 2악장은 대부분 고요한 편인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2악장도 다 뉴에이지 음악에 속합니까?

그 전도사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이렇게 애기 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성악 전공 했다고 말하는 것이, 음대를 졸업 했다는 것이? 어찌하여 음대를 나오지 않는 일반 사람보다 아는 것이 없으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여기서 저기서 줏어 들은 단어 가지고 허접하게 끼워 맞추워서 자기가 만들어낸 절대 불변의 진리인 마냥 지껄(?)입니까?’

나의 마지막 펀치라인 – ‘당신이 스스로 뛰어난 성악가라고 자부심이 대단한데 지저분한 내용을 담은 오페라 가수 보다 이루마씨의 음악이 음악성이 더 뛰어나죠. 당신은 불륜의 내용을 담은 피가로의 결혼, 뉴에지 사상을 담은 모자르트의 매직 플룻을 노래 했다지요? 그러면서 당신이 다른 음악가의 음악성과 장르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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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자는 과연 몇명일까?

어느 한 나라의 군주가 죽었다고 가정하자. 장례식 때 그를 섬기던 많은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자리를 지킬것이다. 그때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정말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일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아니 할 것이다.

한부류는 이럴것이다. 죽은 군주를 진심으로 충심으로 섬기고 보좌 했으며 그의 비젼과 전통을 계승 받고 유지하며 그가 살아 생전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기 이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가 그의 눈물속에 담겨져 있을 것이다.

한부류는 이럴것이다. 죽은 군주와 특별한 관계는 아니였지만 사람이 죽음으로 해서 그것이 그냥 쌓아 놓은 정 때문에 슬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자들은 그냥 좋은 말로 설득하고 이해관계를 잘 성립하면 딸아 올 사람들이다.

한부류는 이럴것이다. 죽은 주군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거추장스러웠다. 이제 그들에게 제약을 가하는 군주가 없어졌으니 그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사람들이다. 겉으로 들어 낼수는 없되 속으로는 기뻐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만의 생존을 위한 방법을 고개 숙여 흐느끼는척 하면서 계획한다. 이런 자들은 나중에 반역에 씨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주군의 죽음에 흐느껴 울면서 앞으로 실행 해야 될 계획들을 잊어 버리는 감상적인 사람이 될것인가? 아니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인 판단만을 앞세워서 전진만을 고집할 것인가? 정답은 딱 한가지 – 상황을 보고 적절하게 판단하여 대응하는 것이다. 정공법이 반드시 성공하라는 법은 없다. 가끔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급한 판단은 화를 부르고 많은 희생을 불러오는 법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순 없다. 준비 된 자에겐 선택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바로 어느때에 이 기회를 잡는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군주의 죽음에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어 강변 너머에 있는 적군들을 대비한 봉화대의 파수병들도 장례식에 참석하여 울게 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군들은 봉화대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지휘관이 없는 나라 방비가 없는 나라를 공략할 준비를 하것이다. 난 파수병이 되어서 봉화대를 지키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거기까지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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