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ch Violin Concerto No. 1 in G minor, Op. 26

예전에 내가 기록 했던 음악 감상록을 정리 하던 중에 2012년 5월 내가 좋아하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민예진양에게 보냈던 노트를 찾았다. 언제 처음 이 곡을 접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번주 수요일 저녁 8시 Pinchas Zukerman과 Sydney Symphony Orchestra와 협연을 하는데 공연전에 복습도 할겸 예전 노트를 찾았다.

1838년 독일의 Cologne에서 출생한 브르흐는 11세부터 첫 작곡을 시작 했고 14살때 교향곡을 작곡한 천재 음악가이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가난에 시달리다가 베를린에서 82세에 생을 마감 했다. 브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1866년, 그가 28살때 작곡을 했으며 초연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평가하길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in E minor, Op. 64과 비슷한 테크닉을 사용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linking of movements (스펠링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타카’라고 한다), a departure from the customary orchestral exposition (내가 이런 말을 어디서 배웠지?), and rigid form of earlier concertos.

1악장은 4분의 4박자의 알레그로 모데라토. 피아노시모로 울리는 팀파니로 전주곡이 시작 되고 뒤에 이은 목관이 꿈을 꾸듯 흔들리고 이어서 바이올린 솔로가 카덴차로 펼쳐진다. 이 부분이 끝나면 격정적인 폭중이 지나가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투티 부분 – 5분 8초에서 6분 22초 사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바이올린 솔라가 제 1테마를 제시한다. 분방하고 격정적인 이 테마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암시하며 다시 우하한 제 2테마를 연주 된후에 드라마틱한 전개부로 들어간다.

2악장은 E flat major 그리고 8분의 3박자의 느린 아다지오. 3개의 아름다운 노래로 구성 된 악장 – ‘가요악장’이라고 불린다. 현악의 pp의 반주를 타고 바이올린 솔로가 제 1멜로디를 노래하고, 이어 프렌치 호른이 제 2멜로디를 노래하며, 그 다음엔 바순, 첼로, 더블베이스가 합헤하여 제 3멜로디를 연주한다. 전문가들이 평가하길 ‘제 2 멜로디’는 바이올린이 표현 가능한 최상의 (아름다울) ‘미’라고.

3악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4분의 2박자, 알레그로 에네르지코로 힘차게 연주가 시작 된다. 혼탁한 비올라의 피아노시모로 시작 되면서 독주 바이올린이 고조 시킨후에, 포르테시모로 제 2테마가 웅대한 finale로 멋있게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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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geunerweisen Op. 20 by Pablo de Sarasate (1844-1908)

니콜로 파가니니 이래에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19세기 스페인 출신의 사라사테 – 작곡가겸 연주가인 그는 13살때 이태리 작곡가인 로시니 (Gioacchino Rossini)로 부터 ‘거인’ (이태리어로 gigante)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연주자였다. 파가니니를 연상케 하는 그의 매혹적인 연주는 일생을 성공으로 치달아 막대한 재산도 얻었지만, 프랑스의 비아리치에서 (Biarritz) 조용한 만년을 보내면서 거의 자선사업에 희사했다.

10살때 마드리드궁에서 묘기를 보여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최고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 (Stradivarius)를 하사받은 사라사테는 많은 작곡가들에게 자극을 주어, 바이올린의 명작을 많이 작곡하게 하였고 음악사상의 공헌도 적지 않았는데, 사라사테의 친구인 프랑스 작곡가 랄로 (Eduard Lalo)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사라사테에게 헌정했고, 부르크 (Max Bruch)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스코트랜드 환상곡을 사라사테에게 헌정했다.

사라사테 자신도 많은 바이올린 곡을 작곡 했는데 모두 스페인의 색채를 짙게 풍기는 독창적인 곡들이며 지고이네르바이젠은 1878년에 작곡 되었고 독일어 제목 그대로 ‘집시의 노래’라는 뜻으로 사라사테가 헝가리를 여행하였을때, 지방 사람들의 민요와 무곡을 소재로 하여 작곡한 곡이다. 바이올린의 애수 어린 선율이 돋보이는 가장 대표적인 집시음악이다.

이 곡은 빠른 패시지를 비롯하여 피치카토, 하모닉스, 도펠그리프, 글리산도등 모든 연주법상의 기교가 총망라된 곡으로 매우 화려하며, 예술적으로 세련된 문화인의 애상과 정열이 느껴지는 곡이며 난이도가 높기 때문에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많이 선택하는 곡이기도 하다. 사라사테의 생존 시에는 이 곡을 완벽히 연주 할수 있는 사람이 사라사테 외에는 없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볼때1부와 2부는 집시들의 방랑 생활과 애수를 노래한다. 1부의 힘찬 도입 다음에 이어지는 수심 어린 아름다운 선율이 정말 매력적이다. 속칭 ‘집시의 달’이라고 불리는 2부는 약음기를 단 바이올린의 애조 띤 쓸쓸한 선율이 정말 감미롭다. 3부는 그들의 자유롭고 유목민적인 느낌을 암시하며 2부와 대조적인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의 숨가쁜 템포로 강렬한 리듬의 선율을 끌어내고 곡예 같은 초인적인 스타카토 기교를 요구하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Pablo de Sarasate, Spanish composer and violinist of the Romantic era, his early music career was never short of fame. Sarasate performed in front of Queen Isabel II in Madrid when he was 10 years old. Undoubtedly he gained the favor of the Queen and received the exquisite master piece Stradivarius which was made by Antonio Stradivari in 1724. An Italian composer Gioacchino Rossini also made a very interesting comment on Sarasate when he was only 13 years old. Not because there had not been a serious conflict of interest between Spain and Italy, Rossini’s comment on Sarasate never seemed to be diplomatic – Rossini referred Sarasate as ‘Il Gigante’ (‘The Giant’ in English). Rossini even praised Sarasate as the ‘Resurrection of Niccolo Paganini (1782-1840)’ who was one of the most celebrated violin virtuosos of his time. Receiving the Stradivarius did inspire many composers around the world. A French composer Eduard Lalo who was a friend of Sarasate dedicated his first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21 to him in 1874. A German composer also dedicated his second violin concerto in D minor Op. 44 to him and it was premiered in London by Sarasate himself, conducted by Bruch in November 1878.

Perhaps it would be correct to say Sarasate’s own compositions are mainly performance-pieces designed to demonstrate his exemplary violin techniques – One of his best works is Zigeunerweisen which was composed in 1878 when he was travelling the country side of Hungary. He studied the local dance music and folk songs, and conceptualized Gypsy’s nature and assimilated it in his Spanish sentiment. This is how this mater piece was created.

Zigeunerweisen is generally known as a ‘must play piece’ for those who aspire to be a violin soloist because it requires a complete set of modern violin techniques to play. The curiosity of those who wonder how difficult this piece is, can be answered – No one else but only Sarasate himself could play Zigeunerweisen in 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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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ia for Piano, Chorus and Orchestra in C Minor, Op. 80 by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라인 강가의 본 (Bonn)에서 출생한 독일의 고전시대의 3대 작곡가 중 한명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요한 때문에 베토벤은 불우한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해서 한 몫 보려던 요한은 베토벤을 4살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고 9살 때에는 강제로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지만 모자르트 같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베토벤의 비범한 재능을 본의 귀족들에게 인정 받아 그는 문화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로 음악 수업을 떠날 수 있었다.

베토벤이 17살이 되던 해에 그가 흠모 하던 모자르트를 만나게 되었고 20살이 때는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즈 죠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을 처음 맞났다. 그는 베토벤의 재주를 인정하여 자신의 제자로 받아 들였지만 느긋하고 여유 있는 성격의 하이든과 다혈질에 급한 성격의 베토벤은 성격 차이로 인해서 사제지간의 사이를 오래 유지 하지 못했다. 베토벤은 스승을 당시 비엔나에서 뛰어난 이론가로 알려져 있던 알브레히츠베르거(Albrechtsberger)로 바꾸었으며, 모자르트의 숙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르 (Antonio Salieri)에게서 성악곡 작곡을 배우게 된다.

클래식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번 ‘합창 교향곡’을 들어 봤을 것이다. 베토벤이 처음으로 인간의 목소리를 악기화 시켜 교향곡에 삽입하여 ‘합창’이라는 표제가 붙었다. 베토벤의 불우의 명작인 ‘합창 교향곡’은 낭만 시대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말러 (Gustav Mahler)는 10개의 교향곡을 작곡 했는데 그중에 5곡이 인성이 들어 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교향곡 8번은 성악가와 연주자가 1천명이 동원 된어야 해서 ‘천인 교향곡’이라는 표제를 얻었다.

‘합창 교향곡’은 오스트리아의 짤즈부르크 (Salzburg) 출신의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에게도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 CD (compact disc)의 용량은 최대 60분이였는데 연주 시간이 1시간 10분인 ‘합창 교향곡’을 한장의 CD에 담고자 카라얀은 당시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용량을 60분에서 74분까지 늘리는 성공해서 한장의 CD에 녹음 할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기악에 인성을 첨가한 베토벤의 혁신적인 시도는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것이 절대로 아니였다. 베토벤이 깊이 공감하고 애독 했던 독일의 위대한 시인 프리드리히 쉴러의 장시 환희의 송가를 작곡 할 의도를 품었던 것은 1793년 베토벤이 23살 때였으니 ‘합창 교향곡’을 완성하기 31년 전에 이미 그 밀알을 뿌린 것이며, 베토벤이 처음으로 기악과 성악의 융합을 결심하고 처음 시도한 작품이 바로 ’합창 환상곡’이다.

1810년에 완성된 이 ‘합창 환상곡’은 단일 악장으로 완성도와 중량감이 떨어 진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는 작품이지만 베토벤의 창작 활동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곡이다. 이 곡은 베토벤이 교향곡에 합창을 도입 시키려는 소위 시험 작품이였고, 이 작품에서 확실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4년 후인 1824년에 ‘합창 교향곡’을 완성 시킨다.

There are many stories about Ludwig van Beethoven – a pupil of Franz Joseph Hayden and a friend of Wolfgang Amadeus Mozart; unfortunate childhood because of his ambitious father; fearless self-righteous vituperator; suffering from severe hearing loss from 26; symbolizing the triumphant human victory against all odds and adversity; bridging Classical era and Romantic era, and so on. It would be correct to say that Mozart was a musical prodigy while Beethoven was an ordinary person with quite musical talent yet backed up by profound exertion.

If you are a big fan of classical music, then at least once you would have heard Beethoven’s last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which was completed 1824 when Beethoven was 54 years old. This is universally considered to be among Beethoven’s greatest works and commonly known as the “Choral Symphony” because this was the first innovative work of ‘instrumentalizing’ human’s voice and the main composition work was done between Autumn 1822 and 1824. Does this make Johannes Brahms look so bad because he actually took about 21 years to complete his 1st symphony in C minor, Op. 68? No, it does not because in fact Beethoven took 31 years to complete his 9th symphony. Most importantly he ‘experimented’ the instrumentalization of human voice in 1810 with Fantasia for Piano, Chorus and Orchestra in C minor, Op. 80 which is commonly known as “Choral Fantasy”.

It is true that masterpieces just do not happen overnight. Beethoven was inspired by a poem written by Friedrich Schiller, “Ode to Joy” when he was 23 years old. He had this idea of integrate human’s voice with Schiller’s poem as lyrics into an instrumental music in a non-opera form and this was how “Choral Fantasy” was created. People may argue that this piece lacks in depth and completeness but there is no doubt that Beethoven planted “Choral Fantasy” as a seedling to have “Choral Symphony” as a fruit and it didn’t happen overnight but only happened 14 years later.

His revolutionary work indeed changed the course of Western music history – diverting away from Classical formalism to Romantic expressionism because nobody ever thought of breaking the conventional structure of symphony by assimilating human’s voice in a choral form in his time. Undoubtedly if there was no “Choral Fantasy”, it could mean no “Choral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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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orak Symphony No. 9 in E minor, Op. 95 by Antonine Dvorak (1841-1904)

1841년 9월 8일 체코슬로바키아의 네라호체베스에서 태어나 1904년 5월 1일, 프라그에서 서거한 안토닌 드보르작은 시종 불멸한 강한 개성의 소유자로, 보헤미아 최대의 작곡가일 뿐 아니라, 19세기의 민족주의 물결과 함께 민족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음악사상의 거장이다. 슈베르트처럼 타고난 음악적 천분은 오스트리아 국가상을 획득 했고, 후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종신 상원의원이라는 최초, 최고의 영예를 차지했다.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오르간과 작곡을 배운 드보르작은 프라그의 에테르바트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역임 했고, 많은 작품들을 내놓았었다. 그가 사랑하던 체르마크가 카우닉 백작과 결혼하게 되자, 그는 그녀와 관련된 많은 가곡을 태워 버리려고 했다. 젊고 청순한 드보르작은 그 후 아리따운 가수 안나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얻었다. 재능 있고 현명한 아나는 어려운 가계를 잘 꾸려나가는 한편, 부군을 격려하여 내조의 공을 새운 숨은 공로자였다.

드보르작의 모교인 프라그 음악원에 재직하고 있던 1892년, 뉴욕 국민음악원의 창립과 쟈네드 사버 여사의 간청으로 미국에서 그곳 음악원장으로 추대 되었다. 3년 동안 그 곳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흑인들의 음악을 연구하는 한편, 신대륙에서 받은 새롭고 강한 인상은 그의 창작의 불멸의 명작을 내개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 토착민의 풍속과 생활을 통해서 그의 시야는 넓어 졌고 1895년 미국이 그에게 베푼 호의와 우정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을 작곡 했다. 현악 4중주 ‘아메리카’ 와 첼로 협주곡 B 단조가 모두 이 때의 작품들이다.

거대한 뉴욕의 거리와 부두, 생활의 강력한 활력에 넘친 신대륙의 압도적인 강한 인상, 아름다운 경치등에서 받은 감명 등은 그의 창작에의 의욕을 더욱 자극 했다. 특히 토착적인 민요의 채집과 흑인들의 음악의 연구는 창작의 새로운 소재들을 샘처럼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 교향곡의 대부분을 보헤미아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아이와주의 스필빌의 피서지에서 쓴 그는, 이곳에서 모국 보헤미아의 분위기를 이민자들과의 생활을 통해서 느끼고 숨쉴수 있었고, 미국 인디안의 민요와 흑인영가의 선율속에 자신의 악상을 접목시켜 새로운 차원으로 재창조하여 모국을 향한 조국애와 애착, 향수 그리고 보헤미안의 숨결이 이 교향곡을 통해서 표현하게 된다.

Antontine Dvorak was set for a new journey for life to American in 1892 when he was 51 years old. Mrs. Jeannette Meyers Thurber, the founder of 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in New York was desperately waiting for Dvorak’s arrival because he was appointed as the new director of conservatory for 3 years.

What Americans were seeking was to establish a new cultural identity independent of imported European ideas as once they declared the independence from the Kingdom of Great Britain on 4th July 1776. Perhaps some may argue that it was an illogical choice to bring a European composer like Dvorak to operate the conservatory along European lines. However, Dvorak was entrusted with a bold vision – to nurture an American voice in music and he saw the future in the music of the indigenous and African-American cultures. He succeeded and his master piece Symphony No. 9 was ‘born’ in America along with his famous Cello Concerto in B minor, Op. 104.

Here is an interesting story – Some may claim that the title of Dvorak’s Symphony No. 9 should be called “For the New World”, rather than “From the New World” because it was simply composed by Dvorak for Americans to portray unique identity of Americans as well as to express his gratitude towards America. However, the music Dvorak himself composed in America was in fact less influenced by his immediate surroundings than by nostalgia for home. He actually spent most of his time in a small town Spillville in Iowa State where many Bohemian migrants lived. Dvorak felt the strong essence of his home country Bohemia from them and he was able to conceptualize his musical motives from the music of the indigenous and African-American then assimilated them in his Symphony No. 9 to express his love, nostalgia, affinity, yearning and attachment to his beloved Bohemia. This is the reason as to why the preposition “from” neither can be omitted nor replaced with another preposition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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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던 부분을 더 읽게 만드는 책을….

접해 본지 참 오래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방금 읽었던 부분을 또 읽고 또 읽는다. 표현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 이전 페이지의 여운이 남아 다시 이전 장으로 돌아 오곤 한다. 이런 인문과학서를 접해 본 것이 이 얼마만인가…..

난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정독 보다는 속독을 통한 다독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방면의 다양한 것들을 간접 경험을 통해 빠른 시간안에 많은 것을 (경제/경영/인문과학/역사/트렌드) 접하는 것이 나에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책을 읽으면서 항상 깔끔하지 않는 여운이 남는다. 그 느낌은 바로 ‘신선한 깨우침’이 미비하다는 것이다. 쉽게 풀어서 애기하면 내가 다 아는 내용이고 이미 겪었고 그러하기 때문에 진부함과 식상함이 심해지면 나도 모르게 시간낭비 했다는 묘한 기분이 들면서 짜증으로 전환 된다. 그리고 그 책을 손이 않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책장에 꽂아 두고 다시는 찾지 않는다.

아마도 10권의 책을 구입하면 그중 9권은 다 신선한 깨우침이 없는 책들이다. 명색에 베스트 셀러라고 하는 책들을 구입해서 막상 읽고 나면 그냥 다 거기서 거기일뿐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난 베스트 셀러는 구입하지 않는다 (삼성 경영 연구소에서 추천하는 책은 제외). 왜냐하면 베스트 셀러는 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읽고 쉽게 공감대 형성이 용이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일부러 남들이 읽지 않는 책, 리뷰가 없고 댓글이 없는 책을 찾는다. 범인 (평범한 사람)들은 소화하기 힘든 책들을 읽고 그것을 파해치는 과정중에 나도 모르게 ‘독서삼매경’에 빠진다. 그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학습의 매력이고 읽는 순간 순간에 머리속에 입체적으로 visualize가 되고, 그 곳에 내가 주인공이 된 순간에 현재와 dislocation이 이루어진다. 만약 누가 내게 ‘행복한 순간’을 물어 보면 바로 이순간이 많은 행복한 순간중에 하나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자오위핑 관리학 박사님께서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이다. 사마의하면 삼국지이고 뻔한 식상한 내용일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역시 경영행정학(MBA)를 강의하는 관리학 박사님의 접근 방식은 참으로 나에겐 ‘신선한 깨우침’이다. 정말 주옥 같은 그의 해석은 한장 한장 읽을때마다 숨이 막히고 단 한문장도 버릴수 없을 만큼 값지다. 기분 같아선 책에 중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재해석을 하고 블로그에 써서 공유하고 싶지만 작가의 아이디어를 도용 하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오늘까지 119 페이지를 읽었다. 앞으로 247 페이지 남았다. 평소 같으면 350에서 400 페이지 분량의 책은 2일 혹은 3일안에 끝냈는데 아무래도 이 책은 이번 주말까지 끝내긴 불가능 할것 같다. 왜냐하면 방금 119 페이지에서 110 페이지 제 4과 ‘역풍이 불 때에 오히려 평상심을 지키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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