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목에 건 진주 목걸이 같이….

귀족이 아닌데 돈이 많아서 귀족 같이 보이는 것이랑 귀족이면서 돈이 없어서 귀족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랑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당연히 있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구분 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쉽게 사용하는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그리고 이 돈을 사용하여 다양한 사회 지도층의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가치를 높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히 돈이 많아서 사회 지도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 지도층 계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이상과 바른 인생 철학 및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이러 조건을 충족 시키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사기극이다.

난 보인다. 단순히 돈이 많아서 귀족 처럼 보이고 사회 지도층으로 보이게 하는 그들의 연극을. 정통성과 전통성을 존속 시키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바른 도덕성과 가치관 및 대의, 그리고 교양과 품위등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명품 장신구와 옷으로 자신을 꾸민다. 이것을 보고 바로 돼지 목에 꼭 진주 목걸이는 거는 격이라 할수 있다.

난 이렇게 되고 싶지 않다. 빛깔 좋은 개살구. 한입 먹어보면 시고 떪어서 먹지 못해 뱃어 버리는 개살구.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과 같이 돈 많이 벌어서 벼락 부자된 사람들 그러나 은행 통장 잔고 액수가 올라 갈때 정신적 귀족주의 교육을 같이 이행하지 못해서 속은 평민과 다를바 없는 짝퉁 사회 지도층들… 난 이런 자들에게 반드시 배울것이 한가지 있다고 본다. 바로 그들과 같이 되면 않된다는 것..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가식과 겸손의 차이는…. 해석하기 나름이지…

오늘 주일 예배 마치고 은혜로운 시간이기 보다는 한 사람과의 대화를 하는 과정 중에서 불끈해서 반격을 했다. 그런데 내가 반격을 가한 사람이 내가 잘아는 사람의 어머니였고 연세가 높으신 분이다. (아마도 내 엄마 연세 정도 된것 같은데)

간단명료하게 애기하면 내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에 내가 가차 없이 반격을 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자존심은 나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내 인생철학이 잘못 됬다고 비판할 때이다.) 이렇게 오픈하면서 애기 하기 위해선 내가 존경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내가 존경 하기 위해서, 다음의 조건을 반드시 충족 시켜야 한다 – 인격, 인품, 학벌, 명예, 사회적 지위, 권력, 인맥, 그리고 돈이다. 이것을 두루 밸런스 있게 갖추고 나의 레벨 보다 높으면 난 존경한다. 너무나 기회주의자적 그리고 물질만능주의적이라고 비판 할수도 있지만 내 나이 34살에 추상적이고 감성적이고 측정하기 불가능한 value를 가지고 사람들을 불확실하게 판단하고 개나 소나 가리지 않고 사귀기에는 내 삶이 너무나도 짧고 시간도 없으며 할일이 많다. 즉 난 절대가치평가 판단 기준들을 반드시 세우고 그것에 맞추고 평가한다. (내가 셀장 소개 시킬때 와규 고기 등급 매기듯 사람들을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의 substance of the story는 이렇다. 난 내 개성이 있고 색깔이 강하다. 한국인의 삐딱한 기독교인으로서 모범적인 모습은 자기 생각 들어내지 않고, 겸손하고, 목소리 작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않고, 대립적인 관계를 피하고, 싫어도 하고 올바르지 않고 잘못되도 ‘주님 안에서’ 라는 배너 아래 서로 용서하고 관용을 배푸는 것이다. 하지만 난 내 색깔이 있고 이것이 그대로 들어 간다. 난 검은색인데 교인들이 추구하는 색깔이 하얀색이라고 해서 제가 왜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내 색깔을 탈색 시켜야 하나? 이것은 가식이고 거짓이다. 검은 나를 부정하고, 가치관과 인생철학과 사회적 위치와 교양 수준이 다른 내가 왜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나를 낮추는 작업이 ‘가식’임이 분명한데 왜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르는지. 이것은 ‘뻥’이고 새빨간 ‘거짓말’ 아닌가…. 내가 왜 웃고 싶지 않는데 억지로 웃어야 하고, 내가 상대하기 싫은데 왜 억지로 상대를 해야 되는가? 내가 남의 비위를 맞추고 남이 손가락질 하고 나를 비판할까봐 겁이 나는가? 내가 싫고 재수가 없고 싸가지가 없다면 그리고 내가 못마땅하면 왜 나한테 정면으로서서 애기를 하지 못할까? 그들이 겸손해서 이런 것일까? 내가 싫은데 좋은척, 사랑하는척 하는 것이 바로 가식이 아닐까…

난 그냥 갈꺼다. 하나님께서 날 독특하게 만드셨으니 나도 독특하게 살것이다. 내 가치관과 신념을 다른 내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형제고 자매’라는 배너 아래서 내 자신을 가식적으로 개조하고 싶지 않다. 난 프랑스 최고의 보르도 와인을 담는 아름답고 섬세한 와인잔 처럼 될것이다. 이런 나를 간장 종지처럼 되게 나에게 강요하지 말라.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제자리 걸음 = 퇴보

왜냐하면 내가 제자리 걸음 할 때 남들은 쉬지 않고 전진하니까…

지난 주일 저녁 KOZY Symphony Orchestra & Choir 공연을 참석 했다. 예전엔 비전문 음악 평론가 입장에서 상업적 성공률과 음악의 수준을 내 나름데로 critical하고 cynical하게 평가하는 재미로 공연을 보러 갔다. 예를 들어 작곡가의 의도에 맞지 않는 표현과 악기 구성 그리고 기술적 부분의 미숙함과 실수 등을 하나 하나 기억 한후 잘 된점 보다는 잘못된 점을 열거하는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뭐라고 할까…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 (BPO, VPO, LPO 그리고 NPO)이 연주한 것을 benchmark로 삼아서 비교하는데 어느 공연이 과연 칭찬을 받을수 있을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공연을 앞두고 2달 정도 코지 관현악단의 지휘자님과 총단장님과 인사할 기회가 생겼다. 앞으로 SSO로 년간 $5,000 정도 후원하는 금액을 코지 관현악단으로 돌리고 이사진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들었을때 난 이미 코지 관현악단의 공연 수준을 객관적으로 더 이상 평가 할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바로 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한호수교 50주년을 기념으로 하는 공연. 호주인과 한인이 만나 화합하여 선을 이루고 같은 한 형제임을 상징하며 다 같은 동등한 호주인을 상징하는 테마. 돈을 받고 연주하는 프로들이 아닌 자기가 음악이 좋아서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고 모여서 열심히 연습한 아마추어들에게 BPO같은 연주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프로 같이 연주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의 기술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난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프로들의 공연을 보러가던지 너무 기술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연주를 하시던지. 아니면 관현악단에 들어와서 한수 가르쳐 주시던지. 남을 평가하기 위해선 남보다 더 뛰어난 식견과 경험, 지식 및 경력을 가져야 되는데… 음악인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평가를 하면… 막말로… 놀고 있네…

어쨋든 첫번째 공연과 비교해 보아서 두번째 공연은 양과 질적으로 또 다른 디멘션으로 업그레이드를 성공했다. 단원들의 음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쳤으며 좀 더 화합하고 어울려지는 아름다운 조화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연주회 였음을 나는 믿는다.

이렇게 전진하고 진화 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 최고를 향해 낳아 가야 함이 당연하다. 난 믿는다. 그들이 내는 음 하나 하나가 이 험하고 살기 힘든 세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 중 나하도 위로를 받고 삶의 활기를 얻게 된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감동의 여운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선율을 상기한다. 그럴때마다 난 지친 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며 나에게 애기한다 – 힘들긴하지만… 멈출수 없다. 더 밝은 내일을 위해서 전진하자. 다같이 우리 함께…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남을 돕는) 기회는 역시 스스로 만드는 법…

정말 추운 시드니 아침이다.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해서 난 겨울에도 여름 양복을 입고 다닌다. 찬바람이 솔솔 스며들어 내 피부를 차갑게 자극할때 머리가 이상하게 더 잘 돌아간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겨울에 차가운 물로 머리를 종종 감는다. (그래서 머리숱이 좀 더 많아진것은 아닐지)

요즈음 목표가 좀 불투명해진다. 궁극적인 목표는 분명히 있는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나 결과 측정이 예전과 같이 깨끗하고 정확하지가 않다는 뜻이다. 예전엔 분명히 눈으로 그리고 금전적으로 측정이 되는 결과를 중시 했다. 결과적을 과정 보다는 결과 중심적 사고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는 사람이 좀더 sentimental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여유로워 졌다고 할까?

이세상엔 꽁자는 없다 (예수님의 구원 외에는)는 인생철학 전제 아래 모든 결정을 나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무조건 6.5%이상이다. (matching cash rate? Negative…) 즉 내가 누구에게 100을 주면 적어도 난 106.5를 받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6.5%는 금전적인 수치를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치’ 수치를 애기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투자는 금전적인 수치를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노하우’를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파악을 짧은 시간에 하고 그에게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준다. 내가 제공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 해야지 많이 얻을수 있는 것을 난 그에게 단 몇분 만에 전수를 해주고 그 사람이 다음 단계로 도약을 할수 있는 주춧돌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에게 기대한다. 적어도 내가 준 밑거름이 도움이 되었다면 적어도 6.5%이상의 성장률은 보여 주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예의상이라도….

이제는 남은 돕는 기회를 찾는데 인색하지 않겠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겠다. 난 훌륭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경영을 돕는 최고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써 양육강식의 원리를 바탕으로 생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롭고 바른 경영을 하도록 돕고 싶다. 그래서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며 억조창생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날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이런 기회를 찾는 더 이상 인색하지 말고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기독교 관점에서 본 ‘겸손’의 정의는….

비양 (겸손)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다… 어디서 나온 말이지? 대학사서오경에 나오는 말이 였나? 맞겠지…

그냥 잘 모르겠다. 기독교 관점에서 본 ‘겸손’의 정의는… 주일 저녁에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중 머리속이 좀 복잡하고 잡생각이 많이 나니 정리가 잘 않될수도 있는데… 그냥 생각나는 데로 적어본다. 머리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내가 보기엔 겸손하지 않다라는 말은 즉 교만하다라는 말로 해석이 된다. 어는때 교만하다고 생각할까? 아마도 목소리 크고,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바탕으로 애기하고, 공동체가 추구하는 목표에 반대 되는 의견과 행동을 할때, 사람들과 융화력이 떨어질때, 인사 않하고 아는체 않할때,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절할때 기타등등.

다 주관적인 평가이다. 겸손의 절대 평가 기준은 없다. 내가 얼마전 셀장소개 할때 한바탕 뒤집었을때 한편은 교만방자하게 받아 들였고 다른 한편은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여기에서 난 ‘진솔한 발언’, 즉 솔직한 발언 그러나 이 말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대로 안정이 않된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발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교만방자하다고 받아 들였을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지 못하고 평소에 준비되지 않고 비능동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는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낮음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뼈아쁜 기회였기 때문에) 그러나 다른 한편은 솔직하고 멋있다라고 반응 했다. 아마도 나의 진심이 그들에게 전해졌고 또 내 가치를 믿고 인정한 그들에게는 내가 어떤 말은 하던 나를 보는 기준은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 겸손한 자의 모델은 아마도 이런 것일것이다. 사람들보면 인사 잘하고 웃고 아무하고나 애기 잘하고 부침성 좋고. 교회에서 행사 있으면 적극 참여하고 목사님이 시키시면 순종하고 아무런 토달지 않고. 제직회때 말도 하지 않고 동의 하십니까 질문하면 고개 숙여서 예라고 대답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않하고 애기 잘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고. 그만 할까?

내가 광대냐? 내가 사람들 눈치보고 비위 맞추면서 살고 그들에게서 겸손하다라는 말을 꼭 들어야 하나? 난 그냥 겸손하다 아니면 교만하지 않다. 뭐 이런 추상적인 표현 보다는 누군가 나에 대해서 말할때 그냥 몇초간의 침묵이나 감탄사로 대신 했으면 한다. 몇초간의 침묵에서 나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형용사를 찾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내가 sophisticate란 말이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는 것은 바로 내가 formidable 하다는 것이다. 난 그냥 ‘겸손’이라는 추상적 명사 (abstract noun)으로 내 자신의 정체성을 절대 함축 시키고 싶지 않다.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