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지면 생필품 그러나 남이 가지면 사치품…

지난주 목요일 아침에 새차를 가지러 갔다. 바로 은색의 Nissan X-Trail TL Diesel이다. 이제 7월말이나 8월초에 셋째 아이가 나올테니 지금 가지고 있는 Audi A4로는 3명의 아이들을 뒷자석에 수용하는것은 조금 불가능할것 같아서 와이프를 위해서 큰 차를 사게 된것이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잘 모른다. 나에게 재산은 현금과 주식 그리고 투자용 부동산이다 (물론 경제적 관점으로 보았을때 말이다). 자동차는 그냥 내가 가지고 사용하는 생활품 정도이다. 난 자동차를 구입하게 전에 이것 저것 세밀하게 대조 비교 하고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적이 없다. 그냥 내가 원하는 자동차를 찾고 딜러에가서 가격을 알아보고 내가 원하는 가격에 내가 원하는 시기에 살뿐이다. 이제 8월달이 되면 셋째가 나오니 그때를 미리 대비해서 큰 자동차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제 1년동안 와이프에게 내 Audi A4를 마음껏 타게 해주었으니 이제 아내에게 새 차를 주고 헌차는 내가 다시 돌려 받는것이다. (계산을 대충 해보니 와이는 1년안에 새 차를 두대를 타보게 됬네…)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셀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은 글을 길게 쓰지 않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똑같은 물건이라도 내가 가지면 생필품이 되고 남이 가지면 사치품이 된다. 이 생필품과 사치품의 판단 기준은 바로 이것이다 – 시기와 질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정말 맞다. 남이 나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많이 이루고 많이 행복하면, 인간은 원래 악하기 때문에 당연히 남이 나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다고 인식이 되면 두가지 반응이 나온다 – 존경을 하거나 질투를 하게 된다. 존경을 할경우는 그 사람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인식과 인정 (쉽게 말하면 ‘난 그렇게 될수가 없기 때문에’ 즉 일종의 절망이 긍정적인 반응으로 표현 되는 경우)하게 되는 것이며, 질투는 그 사람의 위치가 인식은 되는데 인정을 굳이 하고 싶은 일종의 반사적 적대감이라고 한다.

그럼 난 과연 어떨까? 나보다 뛰어나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룬 자를 볼때? 난 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하는 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습득하며 배우기 위해서 방법론을 구상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갈때 (대부분은 초월하지만) 그 사람에게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내 자신을 개발 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중에서 나에게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 보다는 성장과 도전이라는 논리적 사고가 먼저 앞선다. 이런 elements가 바로 나를 성장 시키는 생필품이며 남에게는 이런것을 보고 ‘인생을 참 피곤하게 사는 방법’으로 인식된다. 바로 가치관의 차이…. 내가 이런 사람들의 가치관의 변화와 발전을 시켜야 될 책임 의식을 느껴야 되는 것일까? 아니다. 내 자신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성장 시키지 못하는데… 즉 내 코가 석자고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냥 나 혼자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잘 맞추어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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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S중에 한개가 없었는데….

호주동아일보 기자님과 인터뷰 하는데 이런 애기를 한적이 있다. 주류 사회에서 성공하기에는 신뢰, 신용 그리고 실력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요즈음 들어 세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이 세가지의 S보다 더 중요한 S가 뒤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S가 없으면 앞의 세가지 S가 제대로 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자본주의 사회적 관점으로 분석을 한것이다. 남자로써 사회 생활을 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실력이다. 뛰어난 실력과 경험을 소유하고 이것을 계속 꾸준히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변동 없이 지속적으로 발휘를 하며 장시간 이것에 위의 경영진이 익숙해지면 당연히 신뢰 (trust) 와 신용 (credibility) 이 생긴다. 비슷한 말 같지만 영어적 idiom으로 해석하면 두 단어의 내포된 의미는 정말 다르다.

위 세가지 S를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바로 절대적 S는 바로 ‘신앙’이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여태컷 부정해온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신앙 없이는 절대적으로 세워 질수 없는 이것들을 난 인간의 힘으로 스스로 세웠다고 자만하고 내 자신을 쇠뇌 시킨지도 모르겠다.

이제 부정하지 않겠다. 나 혼자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나 혼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 이 교만의 우산을 활짝 펴고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면서 간간히 나에게 다가오는 역경과 고난을 맞으면 나 혼자 힘으로 해결 하려고 발악을 한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은근히 나에게 침묵으로 다가오는 압박감과 걱정, 근심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은근히 난 속으로 외친다 – 하나님 절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나의 기도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기도는 나의 자존심이라는 방음벽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사람의 입모양을 보면 무슨 애기를 하는지 알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선 내가 입술로 고백하기 전에 내 고민을 해아리시고 기도에 응답하심을 난 믿고 안다. 이제 점점 철이 들어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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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의 오보에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왜 하필이면 오보에 일까? 다른 악기도 많은데….

바이올린은 어떤가? 하모닉스 연주 기법을 사용해서 귀청을 자극 시키는 강렬한 고음 멋있고 튀지 않는가? 첼로는 어떤가? 악기를 너무나 사랑하여 가슴으로 안고 애절하게 연주하는 느낌을 주고 중저음으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게 만들지 않는가? 더블 베이스는? 덩치가 제일로 크고 무직하며 중심을 잡아준다. 프렌치 혼은 꼭 중립적 위치에 있어 술에 타면 술탄듯, 물에 타면 물탄듯 하다. 다른 금관들도 묵직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오보에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오케스트라의 정중앙에 앉아서? 다른 악기들보다 숫자가 적고 협주곡에서 특히 2악장에서 독주 부분이 많아서? 아니다. 내가 오보에 같이 되고 싶은 이유는 딱 한가지. 바로 모든 악기들이 오보에의 ‘라’음에 맞치기 때문이다.

어떤 곡을 연주하던지 오케스트라에서 튜닝은 오보에의 A에 맞춘다. 즉 오보에가 A음을 제대로 내지 못해서 다른 악기들이 튜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음악이 엉망이 된다. 즉 오보에가 모든 악기들을 튜닝 시키는, 즉 모든 악기의 음을 unify시키는 아주 중요한 그리고 절대적인 역활을 한다. 그래서 난 오보에가 좋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정통성과 전통성을 추구하는 완벽한 완고함.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에서 희석되거나 없어졌다. 바로 이것이 ‘신념’이다. 난 이것을 지킬것이고 추구한다. 그리고 내 A음에 사람들을 맞출것이다. 많은 이들이 내 음이 틀렸다고 손가락질 모르나 그들은 내 음에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그 연주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관객들이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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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넘어진다는 것 보다 넘어 진다는 그 기분 자체가 너무나도 싫다…

왜냐하면 바닦까지 내려가 봤습니까. 밑바닦에서 허우적 거리며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았던 나에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패배자의 치욕같은 것이다.

난 바이오리듬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별점도 당연히 사주도 믿지 않는다. 비기독교적 코멘트인지는 몰라도 난 뿌린데로 거두며 노력 없는 곳엔 열매가 없으며 준비된 자는 기회를 얻을 것이며 이런 자들이 바로 신에게 선택 받은 지도자들이다. 이런 반열에 스스로가 속했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앞길은 평단하고 순조로우며 거침 없는 진격을 매일 한다고 생각하면서 순간순간 내가 감당치 못할 일들 (내 책임 외의 것들)을 직면하면 나도 모르게…. 그냥 넘어질것 같다는 그런 묘한 기분. 아직 무릎이 땅바닦에 닿지도 않았는데 내 머리가 땅에 가까워 진다는 그런 묘한 기분… 승리자에서 패배자의 길로 들어간다는 정말 더러운 기분…. 난 이런 기분이 정말 싫다.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 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 가지도 또 조바심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서 포부가 커지지만 내가 직접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직면 했을때 소심해지고 조바심에 식은 땀을 흘린다. 남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구하는지 모르나 난 이런 상황을 직면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의 나약한 인간으로써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런데… 사람 일은 내 마은데로 되질 않는 다는 현실을 마추치면… 한없이 작아지고 내려가지는 나….

이 생각을 어떻게 없애지? What if it happens…… Should I say “Why worry about something that hasn’t happened y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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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적이 없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적과 동지에 대한 명언을 담은 책중에서 읽었던 대목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머리속에 상당히 오랬동안 맴돌았다.

가끔씩 외로워 질때가 있다. 속마음과 고민을 마음껏 털어 놓고 애기 할 상대가 있기 보다는 뭔가 좀더 이상적인 4차원적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더 완벽해 보여야 하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으며, 머리는 차가 우면서도 마음은 따뜻하고, 냉철하지만 따뜻하게 품고 관용 할수 있는 자세를 가진 이사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리가 내 자신을 이렇게 만든것이지 아니면 스스로의 모습을 이렇게 만들어 나가는지 잘 모르겠다.

가끔식 혼자서 적적하게 술잔을 기울일때 누군가 나랑 같이 내 앞에 앉아서 내 애기 이것저것 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나도 알고 보면 평범한 사람중에 한명이며 나약한 인간일뿐이니까. 그런데 종종 누군가 앞에 앉아서 푸념을 털어 놓고난후에 참 많은 후회를 한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아무런 return 없는 왜 영양가 없는 짓을 했을까. 푸념을 늘어 놓는다고 해서 원초적인 문제가 해결 되지가 않는다. 그냥 나의 인간적인 나약함과 무지를 들어내고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것 밖에는 되질 않는다.

그래서 고독하게 호텔 바에 앉아서 향기로운 콘약을 즐길때 난 생각한다. 내 주의에 있는 적들을.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주의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부류는 나를 절대적으로 칭찬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그룹이고 다른 한부류는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시기 질투하는 그룹이라고 한다. 뭐라고 할까… 내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이상적인 모습을 인위적으로 보인 결과라고나 할까? 하지만 적들이 있어서 좋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흠집이 잡히지 않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그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주의에 있는 많은 적들을 나를 더 성장 시키는 긍정적인 요소를 작용을 한다.

참고로 적이 많으면 좋다. 왜냐하면 적이 였던 사람을 친구로 만들면 그 우정이 더 오랬동안 존속이 되기 때문이다. 싸우면서 정이 많이 든다는 옛날 속담 한가지도 틀린것 없다. 난 앞으로도 많은 적을 만들것이며 그 많은 적들을 나의 친구로 만들것이다. 그들중 내가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나의 재주를 필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면 과거의 적이 였던 그들의 존재감이 나에겐 별로 문제가 되질 않는다. 친구는 가까이 적들은 더 가까이… (누가 애기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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