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다장조 작품 번호 26번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난 이 작곡가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해선 더욱더 모른다. 하지만 공연전에 곡에 대한 해석과 작곡가에 대한 공부는 당연한 필수 요소이니 오늘도 변함 없이 그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

러시아에서 출생한 직원에게 물어 봤다. 러시아인의 관점으로 봤을때 림스키 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프로코피에프 중에서 어떤 작곡가가 가장 존경을 받는가 물어 보았는데 프로코피에프를 가장 높게 평가를 했다. 바로 그를 진정한 러시아 애국자라고 평가를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는 러시아 혁명이후에 러시아로 돌아 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러시아의 혁명을 피해서 그는 일본과 미국을 돌아 다니면서 파리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 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서 그의 역량을 대표할 만한 걸작이라고 평가된 이 곡은 자신이 직접 솔로이스트로 시카고 교향악단과 초연을 했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현대적 감각으로 짜여진 비정적인 구성미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나 인간미가 상실된 느낌)의 협주곡이란 평을 받았다.

1891년 태생으로 러시아의 혁명과 당시의 유럽의 혼란을 몸소 체험하고 동란의 시대를 폭넓게 살아간 격동기의 예술가였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 그의 음악에는 양극적인 요소가 병존해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즉 낙천적이고 장조적인 요소와 구성적, 또는 기계적인 요소를 볼 수 있는가 하면 야성적인 힘과 아름다운 서정, 근대적인 음감각과 고전적 양식, 건강한 리듬과 신랄한 풍자가 독특한 결연을 해서 존재 함이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음악원에 입학해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제자가 되고 20세 전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유럽의 근대음악과 Alexander Scriabin (1872-1915)의 영향을 받아 전위음악(현대음악)가로 전통파괴에 앞장섰다. 평론가들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비교 될 만큼 거칠고 충동적인 것이어서 한때는 그 의 음악의 ‘입체파’ (Cubism –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서양미술 표현 양식의 하나로 입체주의 라고도 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paradigm shift라는 것은 존재한다. 몇년도인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전통파괴에 앞장 섰던 프로코피에프가 ‘고전 교향곡’을 발표함으로써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단순성을 모색하는 길로 나섰다. 이것이 바로 neo-classical movement이다. 그 초연은 일반청중을 놀라게 했으며 그는 그때부터 고전적인 형식감 속에 남성적이고 힘찬 내용과 우아한 서정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표현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바로 이때 작곡된 것이 피아노 협주곡 3번 다장조 작품 번호 26번인것이다.

난 여기까지이다. 악보를 읽지 못하니 당연히 음악적인 분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에 내포 된 향수나 우울함을 찾아 보기 어렵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향수적인 (nostalgic)한 element가 많다는 것은 그가 비록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정을 간접적으로 음악을 통해 표현 되지 않았을까? 그럼 다음 블로그에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에 대해서 써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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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소비에 대한 심리 코드는…

바로 4가지로 나누어진다.

Y-axis: 허영 & 과시 Vs. 근검 & 절약
X-axis: 집단의 가치 Vs. 개인의 가치

(1) 허영 & 과시 + 집단의 가치 = 면식수행 간지형
(2) 허영 & 과시 + 개인의 가치 = 신소비 노블리제형
(3) 근검 & 절약 + 집단의 가치 = 명퇴 직전 김부장형
(4) 근검 & 절약 + 개인의 가치 = 고집 센 패거리형

길게 설명 않하고 결론을 내리면 이렇다 – (1)과 (2)가 소비를 이끄는 계층이다. 왜냐교? 집단과 개인의 차원과는 관계 없이 허영과 과시욕이 높은 집단이 바로 면식수행 간지형과 신소비 노블리제형이기 때문이다.

신소비 노블리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소비한다. 이들에게 소비의 행위는 바로 자신이 가진 풍요와 삶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한 것. 풀어서 애기하면 정신적 귀족주의 (댄디즘)에서 파생 되었다고 할수 있다. 좀더 좋고 낳은 것을 추구하는 소비층. 예를 들어 건강을 우선시 하는 웰빙족이 유기농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좀더 높은 프리미엄을 지급하고 구입을 함으로 해서 평범한과 거리를 두고 차별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면식수행 간지형은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을 위한 소비한다. 이들에게 소비의 행의는 바로 자신이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 풀어서 애기하면 유행을 따라 가고 명품 쫓아 가는 대가리 빈 된장녀를 애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향상하기 위해 무형적인 자아개발 (교육)을 추구하기 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명품 구매력으로 표현하여 차별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소비 노블리제형은 상품의 질이 물론 중요하지만 상품을 생산 & 공급 & 판매하는 매개체와 communicate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 받고 차별화를 추구하는 반면, 면식수행 간지형은 단순히 브랜드 이미지만을 고집하여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가치가 명품 때문에 상승한다는 착각속에 빠지면서 구매를 촉진 시킨다.

근검 절약형은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싸고 양질의 물건을 합동 구매들을 통해서 세이빙을 얻으려 한다. 여기서 얻어진 세이빙은 다른 구매 활동을 위한 저축이 아닌 미래에 생길 기대밖의 구매 활동이 요구 될때를 대비한 비상금 (예: 병원 진료비)으로 사용 된다.

이 4가지의 심리코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양한 소비층을 이루는데… 이들의 분포도는 고정 변수 일까 아니면 유동 변수 일까…. 이들의 소비 형태의 변동을 어떻게 하면 읽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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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 Part III

요즈음 기억이 가물가물 해져서 예전에 읽었던 중국고서들의 주인공 이름과 시대 배경과 상황이 잘 기억이 않났다.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은 당연히 기억이 나는데… 아쉽게도 사람들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이것이 중년의 노망인지 기억력 감퇴인지 잘모르겠다. 어쨋든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개국공신이 제일 먼저 역적으로 몰려 죽는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리속에 갑자기 떠오른 사람의 이름은 정도전. 고려를 명말 시키고 (마지막 왕이 우왕인가 공양왕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 이성계가 이씨 조선을 세우게 한 일등공신. 조선 건국때 한양천도를 주장 했고 튼튼한 내정을 다지게 한 정도전. 그러나 세자 책봉 문제에 줄을 잘못서서 제 1차 왕자의 난 때에 이방원에게 암살을 당한다.

항우를 무찌르고 유방이 세운 한나라로 돌아가보자. 정확한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지만 두명의 뛰어난 재상이 있었다. 한명은 한나라 건립후에도 개국공신으로 꾸준히 활동하다가 모함을 받아 오명을 남기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또 다른 한명은 한나라 건립후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시골로 내려고 조용히 살아 평안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위의 두가지 예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이 무엇이냐면… 바로 박수 칠때 떠나라는 것이다. 커피 한모금을 넘기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난 개업공신중에 하나이다. 회사 설립의 초기 단계부터 있지는 않았지만 이제 (아기로 말하면 뒤집을려고 시도하는 상황) 곧 시작을 하려는 순간에 회사에 입사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의 재주를 인정하고 나를 능력을 높게 산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아직까지 신뢰하는 다른 한명의 주인이 있지만 형식상 그리고 구조상의 다른 어리석은 주인은 나를 세상을 떠난 주인만큼 신뢰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에겐 난 단순히 내가 섬기는 그 집안의 ‘종’ 혹은 ‘집지키는 개’ 정도로 생각 할찌도 모르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젠 좀 달라졌다.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면 언젠가는 버림을 받을 것이다. 버림을 받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된다.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가?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직장을 미리 마련하거나 사업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나의 이용 가치가 떨어졌다고 해서 나를 단물빠진 껌 뱉듯이 뱉어 버린다면 그것에 대한 ‘복수’는 과연 어떻게 준비를 해야 되냐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다. 들추고 싶지 않는 것이 있다. 가리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이것을 덮어주고 감싸준 사람이 처음엔 은인이 될수 있을지 모르나 그가 돌아서면 이자가 바로 최대의 적이 되는 것이다. 최대의 적은 혼노지에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 절에서 자기 부하 장수가 배신해서 일본 통일을 앞두고 자결한 내용을 바탕으로 생긴 속담이다. 다시 말해 내부의 약점을 많이 알고 그것을 만약 자신이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경우 이것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고의 반격책인 것이다 – 내가 무참히 버려질때.

뛰어난 경주마가 부상을 당해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이용가치가 더 이상 없으므로 총으로 쏳아 죽여 버린다고 했다. 자유경제 자본주의에서는 의를 지키기 위한 물질적 희생은 없다. 이용 당하는 만큼 이용하는 것이고 이것에 대한 정당한 댓가가 오고가는 것이다. 만약 이런 밸런스가 깨진 다면 두 사람의 관계 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절대적 의존 관계 + 상호보완적 관계… 이런것이 과연 존재 할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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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 Part II

이전에 신뢰는 어떻게 쌓이는지 한번 되 짚어 본다. 신뢰를 쌓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위기가 닥쳤을때 논리적으로 상황 판단 잘 않되는 순간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대가를 원하되 말하진 않는다) 묵묵히 같이 옆에서 돕는 것이다. 그러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은혜’를 입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자는 도움을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묘한 영특함/간악함이 들어 난다.

‘은혜’라는 말.. 단어 자체는 정말 우와하고 멋있다. 정말 성인군자들에게 어울리는 말 같지만 사실 은혜라는 것 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은혜를 입은 자는 기억력이 짧다. 다시 말해 자기가 받은 은혜를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예가 정말 허다해서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내 주의에도 많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잊어 버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고 바로 ‘은혜를 기억 한다’는 것이 그에겐 ‘족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면 ‘죄책감’으로도 바뀌며 도움을 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간만 어긋나도 자신이 이용 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도움을 준 쪽에서 은혜를 입은 댓가로 무엇을 요구 할 경우). 그래서 이런 족쇠 혹은 죄책감에서 벗어 나고자 될수 있으면 은혜를 빨리 갚아 버린다. 왜 그러냐고? 은혜를 빚의 일종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었는데 빨리 갚지 않으면 사채 이자 같이 되어서 점점 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은혜에 경제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접목 시키고 ‘은혜’ = ‘빚’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우리는 자유경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면서 이해타산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 그럼 도움을 준 사람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다. 난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은 믿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다. 도움을 주되 이런 이유와 동기를 정확하게 표명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단 한가지 –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 순간 ‘희생’ (투자)를 함으로 미래에 나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인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고등 교육을 받고 자유경제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사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만약 우리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을 품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 할수 있다면 길거리 노숙자는 한명도 없어야 되면 탈선된 청소년도 없고 범죄도 없고 살인도 없어야 된다. 이런 이상주의는 자유경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도움을 준 사람은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며 만약 자신이 기대 한것에 비교해 리턴이 오지 않을 경우 그는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면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그를 취급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도움을 준 사람을 상습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로 ‘죄책감’을 사용해서…..

8년동안의 직장 생활에선 난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적절한 수준에서 잘 갚아 나가고 있기 때문에 서로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가 사이 좋게 존속이 된 것이 객관적인 해석인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넘어가자. 차가운 맥주가 갑자기 한모금 마시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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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 Part I

자유경제 자본주의 관점에서 봤을 땐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애기다. 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한다. 서로 속이고 속아 준다. 그리고 이용 가치가 없을 땐 그냥 무참히 버린다. 이 논리를 과연 부정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조건 없는 사랑, return을 바라지 않는 진실한 헌신과 희생.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존재 할까? (물론 드라마에서나 동화책에선 존재하지만) 이런 것이 표면상으로는 존재 한다고 보지만 사실 그 아랜 이것들을 존속 시키는 ‘족쇠’가 분명히 있다. 이것을 악용하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약점’이겠지만 미래에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투자’이다.

오래 간만에 나의 가치를 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시드니에만 직원이 거의 60명 스리랑카 지사에는 100명을 넘었고 연매출이 53밀리언 달러를 달성 했다. 월 매출 (현금 기준)을 5밀리언 달러를 이번 달에 기록할 예정이다. 거의 8년간을 근무하면서 난 나의 가치를 높여가면서 일을 했다. 나의 ‘헌신’에 대한 댓가로 많은 것을 받으며 누리고 살고 있다. 늦은 이민자 1.5세 그리고 34세의 나의에 맞지 않는 많은 것을 이루고 가진 내가 순간 고민을 한다 – ‘내가 경영자의 입장 이라는 나라는 사람에게 왜 투자를 하고 돌보아 줄까?’ 이유는 간단 했다. 난 이용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난 항상 최소한의 시간 투자로 최고의 효율을 얻고자 노력 한다. 기계가 사람 대신 할 수 있다면 자동화를 시켜 인력을 줄인다. 같은 일은 같은 방법으로 같은 사람이 두번 일하지 않는 다는 슬로건 아래 항상 어떻게 하면 좀 더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정확하게 할 수 있을까 끝없이 고민한다 (Kaizen). 그리고 이런 바른 생각에 좀 더 부가가치를 향상 시킬수 있는 성실함과 신뢰를 얻었다. 여기서 한가지 고민을 한다. 난 이것들을 8년동안 꾸준히 유지를 해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꽃 잎도 피면 지는 법이고 흥하면 망하게 되있다. 예전의 아이디어들은 소멸하고 기존의 기술력은 퇴보 된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자유경제 자본주의 관점으로 본다면 희소성 가치는 반드시 하락하게 되어 있고 그러함으로 당연히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좀더 현실적으로 애기를 한다면 ‘버려지기 전에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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