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 하려면 줄을 잘 서야지….

간혹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보면 성격도 괜찮고 재주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학벌도 좋다. 그러나 직장에선 맥을 못춘다. 생각보다 조직에서 위치나 영향력 그리고 일에 대한 보수도 낮은 편이다. 과연 왜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 한가지는 바로 ‘줄을 잘못 서서’…..

출세 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 틀린것 하나도 없다. 선거철에 정치인들의 움직임들을 잘봐라. 권력을 가질 사람 뒤에 서기 위해서 분주하다. 여기서 아마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보다는 유동성을 하나의 효율적인 정치적 수완으로 보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 이러니 신뢰와 신용 아니 충성이라는 단어는 그냥 우리에게 생소한 추상명사로 점점 멀어져만 가는것 같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샐뻔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줄 잘서기’는 다름이 아닌 직장에서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상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정해진 목표를 이루도록 독립성과 자치성을 인정해주고 뒤에서 지원 사격을 필요시에 해주는 사람을 애기한다. 하지만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다 – Never outshine your master. 즉 윗사람보다 너무 뛰어나거나 자신의 재주를 과시 할 경우 오히려 자신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manager급들의 사람들이 고용하는 직원들을 보면 하나 같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이다. 왜 이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한다 – 너무 똑똑하고 재주가 빼어나면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수도 있고 자신이 마음데로 부리기에 힘들수 있다는 전재를 가지고 면접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근히 나사 하나둘씩 빠지고 좀 모자라 보이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용의 악순환이 지속 된다 – A급 간부는 다루기 쉬운 B급 메니저를 뽑고, B급 메니저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평범한 C급 실무자를 뽑는다. 다시 말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용된 직원들의 수준은 점점 하락한다는 것이다.

다시 사람들이 모시는 ‘윗 사람’으로 돌아가보자. 아래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부담이 된다. 그러나 너무 못하면 짐이 된다. 너무 많이 가르쳐 주고 너무 많이 빨리 습득하면 자신의 과실이 들어나고 자신의 방법론의 문제점을 알아채고 거론 할까봐 겁이난다. 반대로 가르쳐 주는데도 제대로 못하면 가르치고 싶은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배척을 하게 된다. 그럼 이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상사 아니면 부하 직원… 내 생각엔 둘다 잘못이 있지만 이런 상황을 적절히 조절하는데는 부하 직원이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상사는 오랫동안 회사에서 근무를 했고 외골수도 자신이 생각의 척도나 방향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유지보수를 고집 하는 것이 통상적인 메니저들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럼 부하 직원은 어떻게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가? 바로 밸랜스다 – 때로는 똑똑하게 때로는 바보 같이.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 자신이 모시는 직속 상사가 looking good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상사가 10개를 가르쳐준다. 그럼 10개를 습득하고 5개를 스스로 깨우쳐도 5가지를 먼저 말하지 않고 이것이 직속 상사에게서 나온 것 처럼 만든다. 일종의 사탕발림 작전이기는 하지만 정말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메니저들은 자신의 권위가 손상 되거나 자신의 명성에 흠이 되는 일이 공개적으로 들추어지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니 메니저가 몰랐던 5개를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하지 말고 메니저가 10개를 가르쳐 주고 그것을 응용화 시키도록 영감과 지혜를 준 메니저를 높여 주는 것이다. 이런것을 싫어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렇게 가르쳐준것은 잘 배우고 빨리 습득하되 가끔씩 일부러 실수를 하고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만들어 놓는다. 메니저가 자신의 과실을 지적하고 그것에 수긍할때 메니저들은 자신의 권위와 위신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러니 실수하면 미안하다 라고 사과를 하고 이것을 즉각 시정 할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대응한다. 이러면서 메니저는 ‘아직 이 녀석은 멀었구나’하면서 안도의 숨을 뇌쉴것이며 자신의 방어률을 낮출 것이다. 이럴때 메니저의 헛점을 간파 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출세 하려면 줄을 잘 서고 펼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된다.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도 장단을 잘 맞추어서 자신이 성공할수 있는 기반을 닦을줄 아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다.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결과중심적 사고… 그게 뭐 어때서?

회사안에 있는 performance management system은 전부 결과 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풀어 쓰면 이러하다.

IF X is completed before Y time
THEN reward A will be given
OTHERWISE penalty B will be given

공을 세우면 충신 공을 세우지 못하면 역적이 되는 것이다. 공을 많이 세우면 중용 되고 실패 해도 면제 될수도 있다. 장군들은 싸움에 나가지 전에 패전 한다면 처벌을 받겠다는 군령장을 쓰고 가기도 한다. 조직 생활에서도 임무완수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결과에 의해 판단이 된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면 상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승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책임을 지게 되며 승진할 기회는 커녕 조직안에서 무능력한 자로 낙인이 찍혀 조직안에서 배척을 당하고 나중엔 스스로 물러나거나 파직을 당할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 자본주의의 파생물 결과 중심적 사고.

만약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면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별을 추구하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고 뛰어난 자이며 이런 자들은 구분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조직의 권력자들과 주주들에게 이익을 위한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이것에 대한 보답으로 상을 받는다. 반면 조직에 이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자들은 불리한 차별을 받게 된다. 전자는 being differentiated이며 후자는 being discriminated이다. 자신의 영리를 위한 차별을 좋은 것이지만 자신을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하는 차별은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정해진 목표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나쁜 것일까? 조직의 번영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정해진 목표를 정해진 시간안에 이루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이런 과정중에 편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때론 도덕적 & 윤리적 관점으로 봤을때 비합리적인 방법 때문에 약자들이 피해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가 좋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영악한 완벽주의자들이 지향하는 결과중심적 사고이다.

그럼 결과중심적 사고의 반대가 되는 과정중심적 사고를 한번 보자. 여기서 먼저 완벽주의자들의 counter-argument를 먼저 애기한다 – ‘과정이 잘못 됬으니 당연히 결과가 나쁜것이다’. 그럼 과정중심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counter-argument는 바로 ‘동기가 불순한 목표는 실패함이 당연하다. 일리가 있다. 또 완벽주의자들은 이렇게 애기한다 – ‘목표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핑계를 만들 시간에 차라리 방법론을 개선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럼 다시 반격한다 – ‘지나친 결과중심적 사고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조직의 이익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circular argument라고 한다 (닭이 먼저인가 아니면 계란이 먼저인가).

아마도 가장 이상적인 결론은 두가지 사고를 적절하게 조절을 하여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이상적인 대답이 아닐까? 사람은 유동성 있게 상황 판단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다르다. 사회는 다양한 개층의 다양한 위치에 다양한 능력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살아간다. 꼭 시소 같다. 나 한 사람의 무개가 많이 나가도 10명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한다 – 먹이사슬 (food chain). 무당벌래는 진딧물을 먹지만 개미가 진딧물을 무당벌래로 부터 보호를 해준다. 코브라는 코끼리도 쓰러트리는 맹목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코브라를 잡는 망구스가 있다. 얼룩말들은 단체로 이동하여 호랑이나 사자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다. 이구아나가 있는 집에는 바퀴벌레가 적고 거미가 있는 정원은 모기가 적다. 이렇게 자연이 만든 먹이사슬을 인간의 힘으로 조정하려고 할때 자연의 밸런스는 깨진다 (예: 미국의 어느 지역에 방울뱀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약을 살포해 그 지역에 올빼미가 멸종 되었다는 애기).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먹이사슬은 존재한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 받는 계급. 소비자와 생산자. 경영자와 실무자. 조직에서 조직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선 결과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는 구별한다. 성공한 자는 상을 주고 실패한 자는 상 대신 벌을 받는다. 이런 과정중에 실무자들에게서 feedback을 얻고 경청하고 제시된 내용을 받아 들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실질적으로 접목 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 먹이사슬은 좀더 이상적인 밸런스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것도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가?)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내가 좀 일 처리를 잘 하긴 하지만….

뭐라고 할까 항상 2%가 부족하다. 내가 말하는 2% 부족은 내 능력이나 실력 부족이 아니라 ‘누가 나를 대신 해서 이런 일을 깨끗하게 해결 할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잠시 생각해 본다. 제갈량의 후계자는 마속과 강유였다. 마속은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나 높이 사서 가정 전투에서 참패하여 촉나라의 첫 북벌을 실패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스승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길목에 진을 치지 않고 산에 진을 친 것이다. 강유도 마찬가지다. 위는 촉보다 10배 강하다. 군사도 인재의 숫자도 그리고 물질적 자원이 10배이상 강했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을 연상 시키는 이런 무리한 싸움을 9차례나 강행하여 국력을 소모 시켜 촉을 패망 시킨 장본인이다. 오와 친하고 위를 경계하라는 스승의 지시를 무시 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흐름을 역행하려는 그의 무모함. 오장원에서 진 제갈량이 슬퍼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직면한 딜레마다. 난 제자가 없다. 난 내가 가진 능력을 전수해 줄 사람이 없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믿는 다면 내가 별 볼일 없는 오리 같은 종자이니 당연히 내 주의에는 독수리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독수리인데 내 주의엔 오리 같은 종자만 있는 것일까?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면 회사와 지역 사회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방지 하기 위해선 내가 해야 될것이 있다. 바로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것이다.

인재 발굴 및 양성에 대한 글을 내가 많이 썼다. 그런데 아직 구체적으로 실천한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재 발굴 작업중 두번째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두명다 총명한 인재임은 분명한데 한명은 지속적인 추진력이 없으며 한명은 불타 오르는 투지가 없다. 다시 말해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써 완벽하지 않고 2% 부족한 사람들이다. 나도 완벽하지 않는데 완벽한 사람을 찾는 다는 그 행위 자체가 상당히 모순인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내가 가진 결점을 보완해 줄수 있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할 능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를 맺을수 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내 주의에는….. 다시 한번 돌아본다…. 내 주의에는…. 정말 없구나. 슬픈 현실이다.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준비 됬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없는가? 나와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전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왜 없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독보적인 존재인 나, 나랑 같은 사람이 이 지구상에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8 빌리언이 사는 이 세상에 정말 나랑 비슷한 존재가 없을까? 그런 사람이 내 주의에 7명만 있다면 그리고 내가 1782년도 태어 났다면 유럽까지 정복하여 대한제국을 건설하지 않았을까? (정신차리고 이제 출근하자) 크크크.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라단조 작품 번호 30번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 혁혁한 명성을 얻게된 라흐마니노프 (전화위복 그리고 대기만성을 이럴때 두고 사용하는 것이 맞나?) –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대비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3번 라단조 작품 번호 30번이다.

작년에 Joyce Yang과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공연을 본적이 있다. 프로그램 노트에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재미 있는 일화가 적혀 있었다. ‘일이 많아져서 비서 한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자동차이다’라고. 프로그램 책자에는 라흐마니노프가 시승식을 하는 사진이 첨부 되어 있었고 정원에 앉아서 악보를 수정하는 사진도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적인 요소를 가민한 것은 아닐뿐 아니라 급변하는 음악사조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그는 melancholic (병적으로 우울한) 그릐고 nostalgic (향수적인) 자기의 음악만을 추구했다. 그는 결국 러시아적 로맨티시즘의 마지막 작곡가, 지휘자 그리고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지난번 공연의 표제가 바로 ‘The Last Romantic’이였다)

그는 미국에서 이 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 했지만 기대한 만큼 호평을 받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미국 공연을 기념 할만한 작품은 아니였다는 것이였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너무나도 유명해 3번이 빛을 보지 못했다라는 애기도 있으며 일부의 평론가들은 라흐마니노프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이 내포된 음악이라고 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의 초연은 달랐다 – “이 새로운 협주곡은 작곡가의 창조력의 가장 좋은 면을 반영 시키고 그의 진지함, 소박함, 음악적 사고의 평이함등 새로운 길의 발견은 없으나 여기에는 신선한 영감이 있고, 단순하고도 찬란한 관현악법과 (예: 활등으로 연주하는 콜레뇨) 아울러 예민하고 간결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런 특성은 외면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동시에 연주가들과 일반청중의 사랑을 언제까지 받게 한다”. 너무 긴가? 나 같으면 딱 3단어로 이 곡을 표현 할수 있다 – Inexpressively and inexhaustibly beautiful.

이 곡은 피아니스트 David Helfgott가 ‘샤인’이라는 영화에서 연주 되었고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 유럽편’에서 지휘자가 된 주인공 신이치 치아키가 피아니스트 손루이와 함께 연주 했다. 애석하게도 3악장의 마지막 부분만 짧게 나왔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언젠가 피아노 협주곡 선호도에 대한 통계를 본적이 기억 난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피아노 협주곡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라고 했다. 아마도 1악장에 나오는 슬라브족의 (발칸 반도) 음색이 같은 반도국의 우리들의 정서와 겹치는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오늘 저녁 이곡을 듣고 잔다면 오늘까지 149번을 듣게 된다.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 작품 번호 18번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스웨덴 연주 도중 서방으로 망명 했고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들어선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그는 고국으로 돌아간 프로코피에프와 대조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몰락귀족의 아들인 라흐마니노프 – 차이코프스키적인 영탄법과 (심각한 고뇌, 고조된 정감등을 주로 정서면에 호소하여 감상적으로 표현 하는 수사법 중에서 강조법의 일종) 프란즈 리스트의 현란한 기교를 아울어 지닌 근대 피아노 협주곡의 인기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 다단조 작품 번호 18번이다. 초연당시부터 절찬을 받았던 이 곡의 작곡 배경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가 존경하고 흠모 했던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그는 고독을 맛보면서 수입의 길을 찾아 다녀야 했다. 그리고 신경쇠약으로 괴로와하면서 고심 끝에 완성한 교향곡 1번이 술에 취한 지휘자 때문에 초연은 실패 했고 참담한 혹평으로 라흐마니노프는 창작 생활이 불가능 할정도로 신경쇠약이 악화 되었다. 그때 마침 니콜라이 다알 박사 같은 명의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들에게 피아노 협주곡 2번 같은 걸작은 햇볕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창작력을 회복한 재기 제 첫번째 작품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내가 이곳 저곳에서 주어 들은 내용을 정리하고 내 마음데로 해석을 해 본다.

제 1악장은 4/4 박자의 모데라토로 소나타 형식으로 연주된다. 도입부는 8소절의 장중한 화음을 피아노시모에서 포르테시모로 울려 가는 솔로 피아노이다. 아르페지오로 소용돌이치는 피아노의 멜로디를 타고 현과 클라리넷이 폭 넓은 첫번째 테마를 제시한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매우 비슷한다. 약간 풋풋하면서 싱싱한 이미지로 변하면서 서정적인 두번째 테마가 피아노로 나오며 오보에와의 대화로 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며 재현부에서는 당당한 행진조로 곡의 느낌이 전환 된다.

제 2악장은 4/4박자의 아다지오로 연주된다. 플룻과 클라리넷이 서로 대화 하듯 주고 받는 테마와 그의 파생 테마로 꾸며진 3부 형식의 아다지오악장인데,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셀린 디온의 All by myself라는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표절 했다는 설이 돌 만큼 감미롭고 아름다운 악장이다.

제 3악장은 2/2박자의 화려한 알레그로 스케르잔도로 연주된다. 변칙적인 소난타형식인데 거칠고 강렬한 러시아 무곡조의 테마를 토대로 하는 제 3악장은 이전 악장과 대조 되며 감정의 최고조를 유발 시키다. 평론가들은 모자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은쟁반에 굴러 가는 구슬같이 아기자기 하고 아름답다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중 2번의 3악장은 콘서트 홀의 천장을 들썩 거리게 할 만큼 강렬한 힘과 열정이 담겨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곡은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주인공 신이치 치아키가 유럽에서 온 지휘자 프란즈 스트레제만과 함께 협연한 곡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5회때 이 곡을 연주한것으로 기억 된다)

Posted in Uncategorized |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