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가치 평가 기준은…..

오늘 점심 시간때 길거리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나랑 비슷하게 시작한 사람이다. 나랑 같은 랭귀지 스쿨을 다녔고 나랑 같이 버컴힐 셀렉티브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는 UTS로 진학을 했고 난 멕쿼리 대학교 진학을 했다. 난 MSGM에서 MBA를 끝냈는데 그는 지금 AGSM에서 MBA 과정을 수료 중이라 했다. 한가지 변하지 않음점 – 여전히 그에겐 촌스러운 중국인들의 특유 엑센트가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말주변이 없다. (어휘력이 상당히 제한 되어 있지만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다)

한가지 우스운 소식을 들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말레이지아 출신의 동창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 공부를 소홀히 하고 아이스하키에 컴퓨터 오락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아이로 기억된다. 자유분방하고 정말 미래에 꿈도 대책도 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였는데… 얼마전 고등학교 동창회에 그 친구가 참석 했다고 한다.

이제야 기억 난다. 고등학교 때 자신만의 그룹을 만들어서 끼리끼리 놀던 인종차별주의자들. 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지내는지 전혀 모르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마도 길거리에 우연히 마추치면 알아 볼수는 있을것 같기도 하지만. 어쨋든 말레이지안 친구도 이들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전에 이지메도 당하고 해서 내가 대신 맞짱 떠준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주먹질 정도 였으니까. 자꾸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기 시작한다. 어쨋든 그 말레이지안 친구가 동창회때 참석을 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허름한 옷차림에 부시시한 머리로 나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를 지나쳤고 아는체도 않했으며 그냥 테이블 한쪽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앉아 있어다고 한다. 그때 오늘 점심때 만난 친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애기를 했는데…. 아주 놀라운 사실은….

1) 대학교 입학에 실패한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가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
2)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돈을 절약하고 꾸준히 저축해서 4개의 주택을 부동산 명목으로 구입 했고, 3억원 상당의 주식을 소유 했다;
3) 꾸준히 그는 해외 주식 투자에 힘쓰고 환율을 가지고 이익을 내며 꾸준히 세계 시장에 대한 공부를 한다;
4) 2주전에 호주 달러가 하락 할것을 예측하고 USD를 hedging 함으로써 15% 이상의 수익을 보았다고 한다;
5) 사람들이 그의 말의 허풍인줄 알고 믿지 않자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현금 보유양과 자산 실적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동창회 오기전에 회계사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난 순간 그냥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주택의 value는 비슷하지만 debt-to-equity 비율이 나보다 훨씬 좋았다. 가장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의 현재 현금 보유량이였다 – 5억원이 넘었다.

시대가 바뀐것이다. 자유경제 자본주의에서는 얼만큼의 유형 자산을 보유하고 그 자산이 얼만큼 빨리 현금으로 전환이 가능한지에 따라 한 사람의 가치 평가가 이루어진다. 말레이지아 출신 친구는 이 현금 변환 유동 자산의 규모가 10억이 넘는다. 과거에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던 공부를 잘하던 못했던 간에 지금 그는 동창회때 참석한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뛰어난 위치에 있었다.

마지막 애기. 친구들이 그를 배웅하면서 주차장에 갔는데 그의 차를 보았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냥 꿈만 꾸는 자동차를 그는 몰고 있었다. 상상에 맞기겠다. 그가 무슨 차를 소유 했는지는. 참고로 그는 카슬힐 지역에 방 5개가 되는 집을 구입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의 60% 이상을 pay off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한다. 그에게 감사한다. 동기유발의 아주 좋은 object가 되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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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일 날에만 효자 그리고 효녀…..

난 솔직히 지금 당장 어버이 날이 몇일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5월 5일이 어린이 날인것은 안다. 왜냐하면 난 어렸을때 5월 5일 선물을 받아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을 잘 하지 않는 것들이 공통점이 바로 한가지 있다. 바로 내 인생에 별로 영양가 없는 것들이다. 이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전화번호는 내가 몰라도 내 인생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은 내 머리속에 이상하게도 register다 되질 않는다. 아마도 어버이 날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날이니 기억을 못함이 분명하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아마도 나에게 이렇게 애기 할것이다. ‘불효막심한 놈’. 그럼 나의 대답은 ‘미친놈 지랄하고 있네’.

교회에서 5월달엔 많은 행사가 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그리고 스승의 날 행사들이다. 어린이 날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이 되는데 어버이 날 행사때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우울하고 예배 끝날쯤에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그런데 난 아무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난 항상 어머니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의에 생각보다 많다. 왜그럴까?

난 엄마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누구는 결혼 한후에 하루 3번 엄마 한테 전화를 한다고 한다. 직장 생활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엄청나게 일을 효율적으로 잘해서 시간 관리가 완벽한 사람이거나 회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는 위치에 있는 찌질이 같은 존재일것이다. 결혼하고 나면 부모의 품을 떠난 출가외인이다. 그리고 상황 판단 못하는 또라이 마마보이들이 이런 짓을 하면서 자기 와이프 점수를 깍아 먹게 한다. 내가 한번 전화 하는 것이랑 며느리가 10번 전화하는 것이랑 맞먹는다. 즉 내가 전화를 많이 하면 와이프가 곤란해 진다. 다시 말해 와이프가 전화를 하고 난 전화를 않해 욕을 먹는 것이 가정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평소 부모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고 여행을 같이 가고 하는 것을 횟수를 보고 효자/효녀를 평가하는 습관이 있다. 난 일년에 엄마와 밖에 나가서 밥을 먹는 적이 거의 없다. 엄마랑 여행을 간적도 없고 한달에 한번 얼굴 2시간 비치면 그것이 최고로 한것이다. 부모와 보내는 시간과 효심이 직선적 정비례인가? 난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몇번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엄마는 가끔씩 나이게 부탁을 한다. 아주 공손하게. (이부분에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고개 숙여 부탁하게 만들어서 내가 또 불효막심한 놈이 되는 것인가? 이젠 귀찮다. 그냥 엿장수 마음데로 해석을 해도 이젠 무관하다) 엄마는 나의 사회적 위치를 존중하고 내가 얼만큼 바쁜지 알고 있다. 그래서 명령 보다는 부탁으로 나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난 엄마가 부탁한 그 일이 엄마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목에 힘들어 가게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한다. 한마디로 엄마의 기를 살려주는 일은 앞장서서 한다. 다시 말해 싸구려 일식당에서 회전초밥을 먹느니 최고급 일식집에 가서 참치 대뱃살 2조각을 먹는 것이 더 낳고, 엄마 대신 장 봐주는 것 보다 엄마 친구가 한국에서 온다고 할때 직접 고급 승용차로 회사 늦게 출근해 가면서 픽업하는 것이 엄마에겐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남들이 하지 못한 한가지를 31살 되기 전에 했다. 엄마가 살 집을 내가 빚을 얻어 구입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자기 앞가름 하기 바쁘다. 심지어 언제 얼만큼 유산이 나에게 떨어질찌 계산하는 놈/년들도 있다. 만약 내가 이런 기회주의적사고를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살집을 마련하기도 전에 내가 살집의 융자를 얻기도 전에 엄마 집을 먼저 구입해서 거기서 편히 사시도록 했다. 2억이 조금 넘는 빚이 나중에 내가 대출을 받을때 어떻게 작용이 될지 누구보다도 잘아는 나였지만 난 이길을 택했다. 엄마가 셋방살이로 전전긍긍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편하기 살게 만든것이 내 나이 30살이였다.

가만히 돌아 본다. 내가 과연 불효자인가? 어렸을때 세상 물정 모르고 겁대가리 없게 사고 많이 쳤지만 학원 과외 한번 하지 않고 2년만에 셀렉티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재수 없이 입학 했으며 혼자 자취하면서 5년반 동안 부모 도움 없이 공부하면서 결혼하고 가정 꾸리고 중소기업의 간부자리에 올라서 자유경제 자본주의 관점에서 볼때 34살이 얻을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고 누리는 내가 과연 부모에게 근심걱정거리인가? 대답은 절대로 아니다.

사람들은 부모님집에 가면 부모님의 잔소리가 싫다고 한다. 난 엄마집에 가면 잔소리 않하신다. 왜냐하면 난 내가 할수 있는 영력안에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 난 엄마의 자존심이다. 그래서 난 쉬지 않고 전진하며 성장한다. 이것이 나의 효도 방법이다. 부모에게 하루 몇번 전화하고 일주일에 몇번 방문하고 얼만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인들의 기준에서 보는 효도률 측정 방법은 나에겐 적용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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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상사를 만나면…..

막말로 직장 생활이 단번에 뽀작난다.

내 밑에 부하 직원 한명이 1주일간 휴가를 마치고 돌아 왔다. 돌아온 그녀의 얼굴엔 불만과 불평이 가득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상사가 5월 1일부터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쁜 업무로 그녀와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는데 퇴근전에 잠깐 애기를 했다 – ‘정말 황당한 경우이며 이번 일은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다’라고…..

그녀의 새로운 상사가 된 자는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용모와 품행이 단정치 않음은 물론이요 전체적인 목표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고 지나친 방법론에 대한 집착과 간섭을 관심으로 착각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적이 거의 없으며 교묘한 책임회피와 사탕발림 작전을 잘 쓰는 간사한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애기하면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 스타일이지만 그냥 소리만 요란한 빈깡통과 같은 존재이다. 무엇보다도 주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며 융화와 화합이 힘든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는 지금 자리에 앉으면 않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만 하자.

사람들이 나의 인사관리에 대해 상당 부분을 오해한다. 바로 내가 micro manage하는 사람인줄 착각한다. 내 스타일은 목표를 정해주고 그리고 그 목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기간을 정한후에 그가 스스로 그 목표를 이루게 도와준다. 필요하면 지원 사격도 해주고 탄약도 준다. 도중에 힘들고 다치면 이끌어 주고 도와준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그를 대신해서 총알받이를 해줌으로서 책임을 진다. 이런 과정중에 그가 배우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 바로 주어진 일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할수 있는지 노하우가 생기며, 우리 둘 사이에는 신뢰가 생긴다. 신뢰의 근본은 바로 서로를 믿는 것에서 부터 시작 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넌 할수 있어’라는 믿은 보다 더 진보된 ‘넌 실패해도 내가 책임져 준다’라는 보호의식을 느낌을 가짐으로 ‘믿음’이라는 씨가 자라 ‘신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서로간의 ‘신뢰’를 다지기 위해선 여러가지 요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내 부하직원의 상사가 된 그는 ‘신뢰’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질 않으니 일이이 참견한다. 그러는 과정중 설명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게 되면 일에 능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 참견은 일처리의 과정의 효율성을 높이히는 것보다 단순히 직원들에게 ‘난 무슨 일을 하고 있다’함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서커스이다. 그중 특기가 바로 자신의 존재성을 장엄한 말과 일반론을 가지고 치장한다. 이렇게 자신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통상적인 수단이 ‘미팅’이다.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한다 라는 실행안을 결정하는 미팅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권모술수중 하나일 뿐이다.

그냥 이런 기분이 든다. 그냥 간신배를 조정에 중요한 위치에 앉히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결정을 조정의 승상과 한마디의 상의 없이 결정한 왕도 돌대가리임이 확실하지만 이것을 막지 못한 책임이 승상에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난 이것을 믿는다 – 한 충신의 침묵은 좀 더 효과적인 반격의 기회를 찾기 위한 작전상 후퇴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난 이번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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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인사라는 것은….

내가 종종 욕을 먹는 이유중에 하나가 거만하다는 것이다. 이 거만함은 바로 인사를 않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는 인사의 의미가 얼만큼 큰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정의한 인사는 다르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하는 인사는 바로 ‘난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에게 배울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친분 관계를 난 중요시 여기며 이것을 존속 시키길 원합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각도로 애기를 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인사를 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바로 ‘난 당신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배울점이 있는지도 모르니 당신을 존경 할수도 없고하니 친분 관계를 중요시 할 이유도 없습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난 내 식구는 챙긴다.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간에 명분을 가지고 한 배를 타면 그 사람은 나의 식구도 존중해 준다. 이것을 난 인사로써 표현 한다. 어떤 특정한 목표를 가지고 모인 단체에서 같이 일정 기간 동안 같이 활동을 할때도 난 인사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표현한다. 물론 같이 보내는 기간 동안에 공통분모수를 찾지 못하면 활동 기간 이후에는 유대관계는 가차 없이 종결 된다.

그러니 자연히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사를 먼저하면 형식적으로 받는다. 그 인사의 정중함에 맞게 난 답례를 한다. 가끔씩 정신 나간 것들이 와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잘 지내죠?’라고 건방지게 접근한다. 어떤 년/놈들은 고개 숙여 인사를 성의 없게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양아치 시절때 윗사람에게 인사를 할때 상대편이 고개 숙인 내 얼굴을 볼수 없을 만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인사를 하는 것이 절대적 원칙이다. 그런데 대충 형식적으로 고개만 까딱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 먹은 예의인지 난 잘 모른다.

난 한결 같다. 직장에서도 그냥 막말로 내가 안면을 까는 직원들이 허다하다. 처음엔 그들이 어색하고 간혹 멸시 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직 사회에서 서열이 분명히 존재하는 곳에서 친근감이 넘치는 인사로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받아 준다는 것이 경영면에서 결코 긍정적인 요소로 나중에 작용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고 문제를 수습해야 되는 순간이 올때 난 그들을 도와주고 문제를 잘 해결하도록 돕는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차갑고 표정 없는 나의 얼굴 뛰에는 뛰어난 능력과 support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인사를 않해도 인사를 받지 않아도 이점에 대해서 이이를 제기한 사람은 이제 없다.

교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도 인사 않하고 지나치는 사이인데 밖에서 부득이 하게 만난다고 해서 난 결코 아는체를 하거나 형식적으로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주일에는 안면 까는데 굳이 밖에서 만났다고 아는체를 해야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일관성이 떨어지고 가식이며 위선 아닌가?

내가 천상천하유아독존안하무인인가? 이것이 97%의 평범한 사람들이 보는 관점이라고 해서 이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일반론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관과 주체성 그리고 인생철학을 compromise 시킬 것인가? 너무 비겁하지 않는가? 내 가지판단 기준이 괴변이라고 내 면전에 말할수 있는 용기 있는자 논리를 가지고 있는자가 있다면 난 그의 경청하고 받아 들일 부분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수용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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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한번도 않한 사람도 없고 욕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난 살면서 인간 관계를 같는데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다른 하는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 인생에 필요한 사람은 내가 가진 이상과 목표 및 세계관을 이해하고 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겹치는 공통분모가 있는 자들이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꿈이 같거나 비슷하니 간혹 비꺽 거리는 순간이 생겨도 쉽게 회복하고 원점으로 돌아온다. 결과적으로 친분과 사교 및 교제가 그들과의 만남이 목적이 아니라 세계관 확립과 재정리 그리고 객관적 분석을 통하여 꿈을 구체화 시키고 현실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자이다.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는 자는 이런 자들이다. 바로 상호보안적 관계를 종속적으로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 어느 계기를 통해서 급속도로 친해진 후에 서로간의 결점을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내고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쌓이고 그것으로 인해 관계가 서먹해지고 멀어지게 되면 나중엔 피차 등을 서로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 필요한 사람 그리고 필요하지 않는 사람을 애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가치’를 판단 한다는 치명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는 ‘미래객체지향주의적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여부이며 그리고 서로 꾸는 꿈의 overlap되는 부분의 면적이 얼만큼 크냐는 것이다.

이렇게 꿈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 자를 찾기 위해서 많은 filtering 작업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중에 한 사람의 경력과 학벌 경험 그리고 능력중심으로 그를 분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흔히 사람을 가려 사귄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을 보는 시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레스토랑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 고르듯, 옷매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고르듯, 일정한 특정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차별’을 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찜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모자랄 때에는 같이 놀고 술마시고 주먹질하고 앞뒤좌우 구분 못하는 철부지 시절에는 그냥 말 좀 통하고 친근감 있으면 그냥 ‘친구’로 구분이 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나이 34살이다. 그냥 좀 친근감 있다고 형식적으로 좋은 유대 관계를 억지로 가식적으로 유지 하면서 시간 낭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짧다. 나에게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앞만보고 정신없이 달려가야 되는 나에게는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는 사람과의 단순한 친분 유지는 절대적 낭비이다.

이렇게 사니 욕을 많이 먹는 나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욕한번도 하지 않은 군자도 없고 욕한번도 먹지 않을짓 한 군자도 없다. 욕을 적게 먹던 많이 먹던 어짜피 먹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인에게 인기를 얻고 만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보다는 소수의 뜻이 합한 자와 힘을 모아 뜻을 이루고 굵고 짧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대인의 갖추어야 할 절대적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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