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을 보고 얻은 지혜…

거품을 뺀 삶을 살자.

지난주 한국에 있을때 지인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축하 하기 위해서 값비싼 샴페인을 몇병 따게 되었다. 별로 능숙하지 못한 웨이터가 샴페인을 급하게 잔에 부었을때 발생하는 거품을 보았다. 여기서 발생한 거품은 샴페인의 급격한 탄산가스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줄이고 공기와의 접촉을 차단함으로 샴페인의 고유한 신선한과 자극적인 맛을 보존한다. 그리고 발생한 거품이 샴페인을 더욱더 우아하게 만든다.

여기서 나도 모르게 한가지 느낀점이 있었다. 처음 샴페인을 따르는 잔에 발생한 거품이 잔을 꽈악 채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그 거품은 사라졌다. 거품이 사라진후에 잔에 남은 샴페인의 양은 굉장히 적었다. 잔에서 생긴 거품의 샴페인의 양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순간 나의 실속 없는 삶이 아닌가라는 질물을 내 자신에게 해본다. 정답은 내 삶에 지금 많은 거품이 껴있다는 것이다.

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응원 해주신 지인들이 동의하는 것은 바로 오랜 기간동안 내가 내 자신을 쉬지 않고 개발 시키려고 노력 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잔에 남은 샴페인이다. 하지만 지금 첨잔이 되어가고 있는 이 순간 거품이 많이 껴있음을 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거품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 만든 인맥이 아니라 남이 가지고 있는 인맥을 사용함으로 인한 미래의 시너지 효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너지 효과는 증명 된것도 아니고 약속이나 보장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what if라는 가정법에 의해 추상적으로 계산된 미래 가치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거품’이다.

거품은 그냥 강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린다. 아무런 힘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소녀시대의 수영의 친구가 소향이고 내가 소향의 친구라고 해서 내가 수영과 절친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난 소향을 다리로 사용해서 수영과 친구가 됨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거품’이다. 너무 추상적인 예인가? 쉽게 예를 들면 연애인인 친구가 있고 그와 어울린다고 해서 내가 연애인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 바로 ‘거품’이다. 내 경우를 애기해 볼까? 대학교수님들과 친분이 있고 초청 강사로 강단에 섰다고 해서 내가 명예교수의 자리를 얻을 거라는 착가이 바로 ‘거품’이다.

‘거품’이 많이 낀 내 인생….. 누군가의 인맥을 사용해서 나의 인맥을 넗히려는 비겁한 나의 인간적 권모술수와 정치편력…. 아마도 내 실력만 가지고는 더 이상의 성공은 불가능하다 여기고 이젠 인맥을 사용해서 성공을 꿈꾸는 나의 어리석은 시도를 생각하니 토하고 싶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치사하게 됬는지… 언제부터 내가 ‘난 실력으로 승부 할꺼야’에서 난 ‘줄을 잘 서서 출세 할꺼야’라고 나의 신념이 변질 됬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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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몰래 욕하는 사람 보다…

면전에 듣기는 싫어도 알면 약이 되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훨씬 낳다.

요즘에 유행하는 것이 있다. 바로 keyboard warrior라는 말이다. 바로 글로 사람의 심기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고 기분 나쁘게 만드는데 재주는 있으나 면전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쉽게 애기하면 face-to-face로 자신의 뜻과 주장을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표현할 용기가 없어서 컴퓨터와 휴대폰의 이메일과 문자전송 시스템을 방어막으로 사용하는 비겁한 자들이 바로 keyboard warrior들이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이들은 면전에 대놓고 애기를 못하는 것일까? 바로 상대편이 폭력을 행사 해서 맞을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난 이것을 믿는다. 뒤에서 남과 숙덕숙덕 거리면서 뒷담화를 까는 비겁한 놈/년들보다 내 얼굴에 30cm 거리를 두고 개베이비에서 소베이비까지 들먹이면서 거칠게 감정적으로 (그리고 객관성과 논리성이 많이 결여된) 대응하는 남/녀가 훨씬 좋다. 이유는 단 한가지 – 이들의 교양 수준과 인격 및 학벌과 사회 위치를 다 구석으로 밀어서 치워 버리고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난 솔직한 사람을 좋아 한다. 좋으면 좋다 혹은 싫으면 싫다. 기분이 나쁘면 나쁘고 기분이 좋으면 좋다 라고 솔직히 들어내는 자가 더 정직하고 뒤끝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텃세와 편력 싸움의 요인은 내가 상대편에게 가진 편견과 오해와 주관적 해석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뒷끝’은 바로 입 밖으로 상대편에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생각을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종의 파생물이다. 이런 사람을 나는 흔히 ‘밴댕이’라고 부른다.

아쉽게도 내 주의에는 밴댕이가 아주 많다. 밴댕이는 잘 삐진다. 나에 대한 불만을 내 앞에서 표현하지 않고 회피 혹은 무시로 극복하려고 한다. 겉으로는 상대조차 하기 싫다고 하지만 속으론 자신이 폭력에 노출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밴댕이는 또 3rd party에게 자신의 불만을 애기하는 과정중에 (뒷담화) 상대편의 동조를 원하고 그것을 얻으면서 안도감과 자아만족에 빠지고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화 시킨다.

지난주 한국에 있을때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편이 자신이 일하는 직종에서 전문지식의 부족으로 손님께 결례를 범하고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을 난 조목조목 정리하고 집어 넘어 갔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순간 내 말이 자신의 부족함 점을 들추니 창피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쁠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보면 자신의 취약점으로 보강하게 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하는 확율을 주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편이 그냥 잘못된 점을 보고 무시하고 지나 갈수도 있지만 내가 스스로 내가 가진 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주입 시키게 동기 부여를 제공하기 위해 난 상대편에게 욕 혹은 폭력을 행할것을 감안하고 용기 있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내가 비겁하고 뒤 돌아서서 군시렁군시렁하면서 투덜거리는 나의 행동은 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상대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아주 비겁하고 비생산적인 행동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난 대화의 수준을 상대편에 눈높이에 맞춘다. 만약 그가 예의를 갖추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나도 그렇게 같은 레벨로 대답을 한다. 이런 경우엔 생산적인 토론과 정보 교류 및 상대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 진다. 하지만 상대편이 먼저 자신이 왜곡된 해석을 하는 오류를 범하고 요점에서 벗어난 인신공격을 시도하면 나도 상대편의 눈높에 맞추어서 동등한 대응책을 강구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욕설이 난무하기전에 주먹부터 올라가곤 한다. 나이 먹으면서 스스로를 교양과 높은 인품을 가진 지성인 & 사회 지도층이라는 말도 않되는 테두리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불필요한 유혈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폭력을 예전 같이 지향하지는 않고 ‘말은 사람하고 섞는 것이다’라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의 말을 인용해서 그냥 무시하는 방법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뚜껑이 한번 열리면 상대편의 연령대와 성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또 유혈사태 이후에 발생된 상황과 이것에 대한 수습 및 대응책이 전혀 레지스터가 않되니 차라리 내 자신과 인류 평화를 위해서 그냥 walk away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임을 나이 30대 중반이 되면서 느끼게 된다. 이것을 보고 철들었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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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의 일처리에 대한 반응이

바로 feedback이다. 직장인의 관점에서 본 이 단어의 해석은 바로 ‘부하 직원들의 업무에 대해 교정을 할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상사의 행동이다. 이 피드백을 잘 사용하면 부하 직원의 사기 상승 및 생산선과 효율성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된다.

난 참 반응이 빠르다. 단순히 반응 속도가 빠르기만 하지 않고 분명하다. 직원의 성장 속도는 상사의 반응 속도에 의해 정해 진다라는 말과 같이 8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서 얻어진 피드백의 효과적인 사용이 한 사람을 적토마 같이 되게 할수도 있고 조랑말 같이 되게 할수도 있다.

얼마전에 상사의 피드백에 대한 직원들의 설문 조사를 모아 놓은 자료를 봤는데 놀랍게도 25% 정도만 상사의 피드백에 시스템에 만족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한 피드백에 실패하는 상사의 유형을 5가지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같이 화만 내는 사자형 – 이상적 피드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하직원은 더 이상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2) 불만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 캥거루형 – 피드백에도 유통기한이 있듯이 뒤늦은 피드백은 부하직원을 당황스럽게 한다.
3) 아픈 데만 찌르는 고슴도치형 – 인격을 폄하하는 쪽으로 발전하면 어떤 피드백을 해도 부하 직원은 신로하지 않는다.
4)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형 –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부학 직원은 늘 긴장할 수밖에 없다.
5) 핵심을 알 수 없는 우물우물 소형 – 노하우를 얻기 보다는 오히려 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개인마다 성격의 차이로 피드백의 방법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주의의 환경과 상황 그리고 시기와 직원의 상태에 따라 피드백의 스타일이 변한다. 이런것을 일관성 없고 소신 없다고 보기 보다는 유동성 있는 피드백 스타일이 atmosphere 개선에 도움을 준다 – as long as 피드백은 빠르게, 좁게, 자주, 분명하게 주어질수록.

나의 피드백이 그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변화 시킬 수 있게 개선에 촛점을 맞추게 하고, 부하 직원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올바른 길로 수정하는 과정을 돕고, 직원들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효과적인 피드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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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은 사람과 조직에서 일할 때의 문제점은?

나에겐 별로 없다. 조직의 최고 기술 책임자는 나이가 아마도 60세가 넘은것은 기억된다. 직원들이 나에게 종종 주는 피트백은 이러하다 – ‘나이 먹어서 그런지 정말 외골수이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지고 수용하지도 않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한다. 자기의 위치와 권위와 목소리 큰 것에만 의존해서 작업 지시만 내린다. 나이 많이 먹어서 경험이 만다는 것을 근거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조건 배척한다’.

나도 60살 먹은 기술 최고 관리자와 딜링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이 나보다 3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 다양한 것을 경험 해봤을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대부분 연륜에서 얻어지는 지혜와 경험은 정말 값지고 무한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이 겪고 얻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경험 할수 있는 일들의 range는 상당히 제한적이고 삶은 그런 range의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번 해보는것 보다 여러번 해 봤을때 더 능숙해지듯이 여러본 해 봤고 이미 젊은 사람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해봤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능숙해 보이는 것이다. 아마도 내겐 60살의 기술 최고 관리자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이유, 그의 연륜이 나에게 지혜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해서 나보다 더 뛰어 날것이라는 선입견등이 없는 이유는 바로 나도 나름데로 젊은 나이에 많은 것들, 특히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의 의견이라고 제대로 듣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조직의 culture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 먹은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말이 라고 무조건 옮고 경청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난 사람들과 상대 할때 그들의 나이는 철저히 배재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유교사상에서 나온 이상한 사상 바로 ‘어른의 말은 항상 옮고 들어야 된다’라는 또라이 같은 사상에 젖어져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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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싫어 하는 타입은….

화장실 들어 갈때랑 화장실 갔다 왔을때랑 틀린 사람. 좀더 쉽게 풀어서 애기하면 받은 은혜를 까맣게 잊어 버리고 스타일의 차이로 인연 끊어 버리는 사람. 쉽게 말하면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은혜라… 난 이 단어의 정의를 잘 모른다. 사람마다 어떻게 이 단어를 해석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난 이렇게 ‘은혜’를 ‘투자’와 비교해서 설명하고 싶다. ‘투자’는 내가 input을 한 만큼 이상의 output을 원할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원하는 return이 있을 경우엔 단 정당하게 ‘투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럼 반대로 ‘은혜’는 나의 input은 return을 위한 것이 아닌 단순히 sunk 혹은 outlay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은혜’를 베풀 경우는 아무런 return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은혜’를 베풀고 하는 것이 한가지가 있다. 바로 그것에 대해서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을 종종 mention 할 경우에 바로 그들에게는 족쇠가 될수가 있고 죄책감을 유발 시키게 된다. 그래서 난 절대로 내가 베푼 ‘은혜’에 대해선 재방송 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나의 실책인것 같다.

오늘 일까지 포함해서 두번 당했다. 괘씸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섭섭하게 생각한 적도 없다. 단 한번도 투자라고 생각한적이 없으니 아까운 것도 아쉬운 것도 없다. 다만 신경이 거슬리는 것은 차라리 ‘은혜’를 베풀지 말고 공정한 조건과 계약 체계를 갖춘 ‘투자’형태의 거래를 했을 경우 더 높은 수익율을 올릴수 있고 또 투자를 유치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도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될수 있는 명분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쉽다.

그냥 좀 황당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일경우야 뭐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그래도 어쨋든 피가 조금 어떻게 섞이고 한 집안 식구인 사람이고 나를 오랫동안 봤고 내 스타일을 알고 본의는 악하지 않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건방 떨지 마라’ 혹은 ‘인격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얼굴 볼 필요 없다’ 그리고 ‘불쾌하니까 메세지 더 보내지 말라’라고 애기하는 것은.. 거참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지? 아마도 내가 마음에 아주 많이 않들었는데 오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서 던진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나에겐 불발탄이다. 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내가 존경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모시는 분들의 조언은 귀를 기울여 듣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본질을 잘알기 때문이다. 나의 방법론에 대해서 수정 사항을 종종 제공한다. 그리고 난 그것을 받아 들이고 고친다. 애석하게도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력 없는 존재가 말한 것은 망설에 헛소리니까.

두번 잘못된 결정을 해서 이렇게 배은망덕한 인간 두명을 내 인생에서 만들었다. 세번째는 없다. 더 이상 ‘은혜’란 없다. ‘투자’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두명다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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