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중달의 고민 – Part II

과거에 난 재벌집을 배경으로한 드라마는 지향하지 않았다. 시작부터가 다르고 태어 나기도 전에 대부분의 것들이 충족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재벌집 자녀들과 난 많은 마찰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시기, 질투, 열등감, 증오, 자격지심이 섞여 거름으로 사용 됬고 뿌리 끝까지 깊게 배였다. 이런 나무에서 열린 열매의 맛은 쓰다. 왜냐하면 열매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자수성가하는 과정중에 이미 가지고 태어난 재벌집 자녀들을 하나둘씩 초월하는 과정중에서 추월/초월/승리라는 단 열매의 맛을 보았고 그들이 이해 되기 시작 했다. 사회생활 출발점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있다고 해서 결승전에 먼저 도착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갈며 죽을 각오로 먼저 출발한 재벌집 자녀를 추월하기 위해 주야로 달리는 동안, ‘출생이 다르다’라는 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여유를 부리는 동안 어느 순간 추월 당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추격을 시작하려고 하지만 가속이 이미 붙은 상대를 재추격하기란 쉽지 않다.

요즘엔 재벌집을 설정으로 한 드라마를 선호한다. 아마도 박신양과 김정은이 주연한 ‘파리의 연인’이 내 선입견의 각도를 바꾸어 놓았다. 요즘엔 재벌집 자녀들을 설정으로 한 ‘상속자들’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배우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이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호텔 주인의 아들로 나온다. 경영 수업을 받는 도중 주방 메니저아 말다툼을 벌이고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유도장으로 아들을 부르고 무참히 KO 시킨다. 이 장면을 보면서 뇌리속을 스친 한마디 – ‘아비 만한 자식 없다’. 어젯밤에는 Star Trek Into Darkness라는 영화를 봤다. 명령 불복종으로 선장 Kerk와 Pike가 티격태격하는 대화중에 이런 말이 있다. “There is greatness in you, but there is not an ounce of humility. You think that you cannot make mistakes.” 이 장면을 보면서 전 위왕과 태자가 말다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알겠다. 왜 돌아가신 위왕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던 것을. 바로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위왕과 태자와의 관계를 지난 9년 동안 쭈욱 지켜 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부풀려서 과대포장/평가하는 태자를 위왕은 탐탐치 않게 생각을 했다. 태자는 자신이 한 결정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결정이며 자신은 항상 옳다고 주장 했고, 자신이 잘못된 순간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교묘한 술수로 책임 회피 했고 자기 아버지의 후광을 빌미로 그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브레이크 망가진 증기관처럼 미친들이 달렸다. 목표도 모른체 그리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체.

시간이 지나면 철이 들고 성숙 해질줄 알았지만 태자는 지금까지 아무런 발전 아니 변화가 없다. 부모의 후광을 입어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에 진학을 했고, 다른곳에서 사회 경험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이 상상조차 할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과 위치에서 일을 시작했다. 시작부터가 다른 태자는 정말 위의 영화 대사 같이 그에겐 ‘not an ounce of humility’였다. 굳이 복합한자성어로 태자를 표현 한다면 ‘천상천하유아독존안하무인’이 가장 적합 할 것이다. 결혼 할때 정말 동화책에서 나온 왕자와 공주 같은 결혼을 해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 결혼 생활은 6개월만에 종결 됬고, 주의에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두고 주색잡기와 음주가무를 즐기고, 평민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천문학적의 돈을 주지육림과 여색의 늪에 끊임 없이 부어댔다.

이런 망나니 태자를 본 전위왕의 부인 황태후도 걱정이 되어서 전 위왕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오빠에게 맡긴다. 이리 새끼를 다루기 위해 굶주리고 비열한 하이에나를 들인것이다. 이에 태자는 현 위왕을 견제하기 시작 했고 그 둘의 완력 싸움에서 황태후는 어떻게 할지 몰라 항상 좌불안석이며,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많은 신규 세력을 외부에서 영입한 현 위왕의 처사에 황태후의 의심 농도는 점점 깊어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이 높게 쌓였고, 조직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한몫씩 챙기려고 자신만의 이익을 돌보고 있다. 근정전에 모여 관료들이 회의를 할때 ‘경청’이란 존재하지 않고 자신만의 의견을 완강히 고집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자들은 배척 했다. ‘의리’나 ‘신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힘 없고 쥐꼬리만한 녹봉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말단 관리들은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사에 집중하지 못하니, 조직의 상태는 점점 악화 되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도 이들이 극히 작은 일에 목소리를 높여 탁상공론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서로서로 의견을 나누고 절충안은 만들어 실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잣말을 큰소리로 하고 나온것 같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떳떳하게 말한 자신에게 공치사를 하며 스스로를 신념 있는 지도자로 포장한다. 이런 애석한 상황을 보면서도 사마중달은 그냥 묵묵히 자신이 해야 될 일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회생 불가능이라면,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면 안전 거리를 두고 언제든지 안전하게 탈출 할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 놓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된다. 여기서 ‘충신’이라는 단어로 내 자신을 얾매이게 하지 않는다. 난 전 위왕에게 충성한 신하지 현 위왕께 충성하는 신하가 아니다. 잘못된 정치를 펴는 왕에게 직언을 해서 몸을 상하게 하느니 파멸의 순간이 목전에 다가와 자신의 과실의 깨닮고 후회하는 순간까지 옆에서 보좌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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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중달의 고민 – Part I

2012년초에 위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정권 교체가 시작 되었다. ‘정권교체’는 체면 유지를 위한 일종의 미사여구이며 여태까지 벌어진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위왕이 뇌졸증으로 급사후 그의 뒤를 이은 성이 다른 왕이 정권을 이었다. 그의 목적은 돌아가신 위왕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전/발전/부흥 시키기 보다는 다른 큰 나라에 위나라를 흡수 시켜 그것에 대한 댓가를 받고 남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목적이였다. 그런데 일이 순조롭게 진행 되지 않자 그는 2013년 4월에 은퇴를 선언 했고, 돌아가신 위왕의 부인은 마음이 조급해져 자신의 오빠를 왕으로 대신 세운다. 어떤 이들은 이 순간을 군웅할거라 부를지 모르나 나는 그냥 쉽게 두 글자로 표현하고 싶다 – 바로 ‘개판’이다.

새로운 위왕을 보면 대학의 8조목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군자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도 이에 현혹 되지도 않지만 위왕과 가까운 친척들에게서 나온 정보라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는 3번 결혼을 했고 3번 이혼 했다고 한다. 위왕이 정권을 잡은 후에 그가 먼저 등용한 인재(?)는 바로 지략은 겸비 하지 못했으나 단지 키가 큰 여인을 했고 그의 역활은 도승지, 즉 조선시대 왕의 비서 역활을 하던 승정원의 우두머리로 세웠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와 위왕은 연민의 정을 품은 관계이며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다수의 사람이 목격 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왕은 둘의 관계를 같이 동거하지 않는다 하여 관계를 부정 했고, 위왕은 일계 도승지에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녀를 옆에 두었다. 물론 이런 인사조정을 전 위왕의 부인은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마중달도 침묵을 지켰다.

조선시대에 왕이 머물던 궁궐엔 경복궁이 있고 그 안에 근정전이라는 건물이 있으며, 이 건물의 뜻은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곳에서 왕이 집무를 보는 곳이다. 그런데 위왕은 새로 왕으로 부임 되자마자 다른 나라로 유람 관광을 떠났고 근정전을 거의 한달간을 비웠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일종의 재충천의 계기라 받아 들이고 사마중달은 위왕이 비운 그 자리를 씁쓸한 마음을 감추면서 묵묵히 업무를 수행 했다. 그리도 유람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위왕은 인사조정을 시행 했는데 바로 첫 좌천 희생양이 사마중달이였다. 9년 동안 전 위왕을 섬기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 보좌한 나는 새로운 위왕의 눈가리고 아옹하는 간사한 정책에 대해 정중하게 저항을 했으며 옮고 그름을 시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난 새 위왕에 눈밖에 나기 시작 했으며 그는 외부에서 새로운 재상을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었다. 내 생각에 따라 외부 인사 채용을 실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허례허식에 의한 형식상 절차였을뿐….. 그래도 새로운 위왕을 돕기 위한 신진세력이 필요함을 알고 그를 돕기 위해 난 내 자리를 양보하기로 했으며 새로운 재상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옛날 사마의가 하후무를 대신 해서 군기를 잡고 촉군을 저지 했을때 조정에서 조진을 대도독으로 승진 시키고 사마의를 부도독으로 좌천시켜 문서나 작성하게 만들었을때, 그리고 조예가 죽을때 사마의를 군권을 뺏고자 태부로 좌천 시킬때 – 난 그의 기분은 천만번 공감한다.

새로운 조직을 구성 할때 외부 인사 채용은 다반사이다. 그런데 문제는 외부 인사 채용 할때 그를 채용 하는 외부인과 지도자와의 관계이다. 새 위왕은 여기서 아주 큰 실수를 했다. 그는 자신과 평소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동고동락한 믿고 신뢰 할만한 인재를 등용 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생전 알지 못한 사람을 두번의 면접을 통해서 등용 했다. 그 등용된 사람들이 기존의 개국공신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과 경험을 가진 자들도 아니며 그들은 융화력이 떨어졌으면 옛것은 폐하고 새것을 추구하는 과정중에, 동의와 화합에 의한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입식 변화를 추구하여 양 세력간의 마찰은 극대화 되기 시작 했으며, 여기서 발생 된 불을 피하고자 경회루에서 주색잡기와 음주가무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니 사마중달의 입장에선 9년대계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것 같아 가슴이 쥐어 짜듯 아프지만 실권이 없는 그는 그냥 침묵의 어두운 그늘에서 기회를 기다린다.

머리속에 여러가지가 생각난다. 전 위왕의 후계자 조비는 왜 아비의 그릇에 절반되 못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후계자의 자격과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일까…. 이 애기는 다음번에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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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 – Part II

남유럽 사람들은 의사 소통을 할때 제스처를 많이 쓰는 스킨쉽이 많은편인데 북유럽 사람들은 쌀쌀할 정도로 침착하고 거리를 지키며 신체적 접촉을 자제 한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친밀감이 넘치는 스킨쉽이 많은 남유럽 사람들에 비해 북유럽의 사람들은 아이들이 버릇 나빠진다는 명분으로 엄하고 무섭게 키운다고 한다.

여기서 난 이런 질문을 했다 – 어찌 같은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이 남쪽의 부모들은 어린이를 ‘하늘이 주신 은총’이라고 여기고 북쪽의 부모들을 그저 어린이를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본다는 것일까? 농업이 많이 발전된 남유럽 사람들에겐 농사짓는 집안의 식구가 많을수록 일손을 거들 사람이 많아지듯이 아이가 생기면 일꾼이 하다 더 생겼다고 좋아 한다고 한다. 북유럽 가정이 평균 1-1.5명의 자식을 두는 것에 비해 남유럽 가정은 평균 4-7명의 자녀들을 둔다고 한다. 그리고 남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하늘이 주신 은총’이니 곱게 길르며 공을 들이니 인구 성장율이 지속적인 반명 북유럽의 국가들의 신생아 출산율은 점점 저하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배운 것은 북유럽과 남유럽이 같은 크리스트교를 믿지만 북유럽은 ‘신교’를 믿고 남유럽은 ‘구교’를 믿기 때문이다. ‘구교’는 지금의 카톨릭이고 ‘신교’는 면죄부 판매 반대 운동의 시작부터 카톨릭 교회에 대한 반박 95개조문을 작성 해서 선포한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와 프랑스의 장 칼벵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이다. 바로 이것이 ‘종교 개혁’이고 구교와 신교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100년이 되었고 북유럽 사람들은 세속적인 면을 고치고 철저한 자기 욕망 절제와 청렴결백을 지향하는 ‘신교’를 믿기 시작 했고, 남유럽 사람들은 융통성 있는 현실적 종교인 카톨릭을 믿기 시작 했다.

결론은 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신교와 구교의 차이 때문이라는것을 나이 지긋이 잡수신 이탈리아 출신의 경영자에게서 오래전에 배웠다.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위해선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 공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상대편의 감성을 건드리는 화술로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고 생각을 읽어 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출생지, 성장 배경, 민족성, 학력, 교양, 상식 수준등을 잘 파악해서 서로 같이 교감하고 이해 할수 있는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이렇게 연륜을 통해서 얻어지고 쌓인 이 wisdom에서 엑기스만 추출해서 나보다 먼저 앞서 나아가 가르침을 주시는 전문 경영인들이 주변에 계셔서 난 참 운이 좋은 사람인것을 세삼스럽게 또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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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 – Part I

2009년 4월에 CFO로 임명 되고 2013년 8월에 다시 CBA로 좌천 되기 전까지 지난 4년 동안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사회 지도층을 만나서 다양한 간접 문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나보다 나이를 지긋이 드신 어르신들이 아들뻘 같이 젊은 경영인인 나를 봤을때 대부분 그들은 나에게 전통적인 문화와 예절 및 양식을 전수(?) 해주려고 한다. 워낙 유럽 문화와 역사 및 지리에 관심이 많은 나이기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도중에 노트를 꺼내서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기록 한다. 얼마전에 책장을 정리하는 중 유럽 문화에 관한 노트를 찾았다. 바로 북유럽과 남유럽의 차이에 대한 노트이다. 이것저것 깨알 같이 많이 적었다. 심지어 내가 쓴 글씨도 못알아봤다. 그런데 대충 흐름을 잡으니 북유럽과 남유럽의 문화적 차이는 날씨와 종교 그리고 가정제도에서 확연히 구분 된다는 것을 상기했다.

유럽에는 수많은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고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핏줄도 많이 섞이고 이리저리 민족들이 옮겨다녔으며 사람과 민족마다 성격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유럽은 이렇다’라고 잘라 정의 할수 없다. 유럽을 크게 셋으로 나누면 – 지중해를 끼고 있는 포르투칼, 스페인 (예전의 에스파냐), 프랑스, 그리스등의 남부유럽; 알프스 산맥 북쪽으로 독일, 영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델란드등의 북부 유럽; 그리고 폴란드,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등의 동부 유럽이있다. 여기서 남부 유럽과 북부 유럽은 같은 유럽이면서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우선 남부 유럽은 대체적으로 날씨가 맑고 태양이 빛나고 지중해성의 부드럽고 따뜻한 기후가 농경문화가 발달한 반면, 알프스 산맥 북쪽의 북부 유럽은 구름이 많이 끼고 비가 많이 오는 음침한 날씨 때문에 목축업과 사냥이 발달 했다. 또 남북 유럽의 큰 차이는 남부 유럽의 가정은 어머니 중심이고 북부 유럽의 가정은 아버지 중심이라는 것이다. 농경문화가 발달된 남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집안 살림을 맡은 어머니가 한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한 반면, 목축업과 사냥을 전업으로 삼던 북유럽 사람들에게는 힘쎄고 용감한 아버지가 주변 위험에서부터 가족을 지켜내야 됬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했다.

이런 어머니 중심의 남부 유럽 그리고 아버지 중심의 북부 유럽의 문화 때문에 현재까지 이런 풍습이 존속 된다. 남부 유럽에서는 여성의 발언권이 정치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남녀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명절때 부모님을 찾아 갈때 대부분 처가집에 먼저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고 딸들의 친청 출입이 잦은 편이고 자유롭다. 그래서 그런지 남유럽 사람들은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반면 북유럽의 사람들은 집안의 핏줄을 이을 아들을 중요하게 여기던 습관이 있어서 아들을 선호한다. 그리고 북유럽 사람들은 공공연한 자리에서는 여자를 무지무지하게 아끼는 양 호들갑을 떨찌만 집에서는 집안일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반면 남유럽 사람들은 가사일을 나누어서 하고 의사결정은 항상 아내와 의논해서 결정을 하는 반면 북유럽 사람들은 남자에게 절대적인 결정권이 주어진다. 그래서 남유럽 사람들은 동양 여자들에게 자상하게 보여지며 북유럽 남자들에게는 ‘못난이 공처가’로 낙인 찍힌다. (마치 중국 남자들이 상하이 출신 남자들을 보는 비슷한 관점으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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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den Symphony No. 104 in D major – Part II

카라얀이 비엔나 필과 협연한 베토벤 교향곡 7번 in A major, Op. 92 앨범을 구입 했을때 그때 같이 녹음 된 교향곡이 바로 104번 ‘런던’ 교향곡이다. 100개가 넘는 하이든의 교향곡을 들어 봤는데 그중 음악적으로 밀도가 높고 뛰어난 작품이라고 난 믿는다. 그의 교향곡 작품으로 최후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걸작.

하이든은 런던에서 융숭한 대접과 환영을 받고 황제를 위시해서 조야의 인사들이 극력 만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향곡을 최후로 귀국할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50년 동안 추구해 온 교향곡이라는 대규모의 기악곡을 이제 ‘런던’ 교향곡 104번으로 결산을 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을 해본다. 그래서 자기를 따뜻하게 맞이 해주었던 런던에 대한 작별의 의미와 그 곳의 유쾌한 생활 속에서 작곡 할수 있었던 12편의 역작을 매듭짓는 의미에서 ‘런던’이라는 이름을 하이든 자신이 붙였다고 한다. 마치 베토벤이 교향곡 5번을 작곡 할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운명’이라는 표제를 붙인것 같이.

하이든은 만년에 이르러 후배이면서 절친인 모짜르트의 기법을 솔직하게 배우고 그 영향을 받았는데, 그 흔적을 가장 구체적으로 뚜렸하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교향곡 발달사에서 흥미 깊은 위치를 차지한다. 지는 해 같은 구관이 신진 세력의 새로운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받아 들이고 수용하여 서로 화합하고 사이 좋게 융화 되는 멋진 모습이라고 할까나.

제 1악장은 2/2박자에서 4/4박자의 아다지오-알레그로. 기우가 광대한 소나타 형식이다. 가슴에 울려 퍼지는 무겁고 느린 서주는 다이나믹한 대비와 (카라얀은 페르마타를 좀 길게 해서 우아함과 중우함을 더 강조한것 같다) 아울러 장중한 분위기가 그의 수많은 교향곡 중에서도 비할 데 없다. 기품 있고 여유 있는 알레그로의 제 1 테마는 우선 바이올린으로 제시 된다. 그리고 이 테마는 그 구성요소가 이 악장을 엮어 나가기에 필요한 모든 모티브적인 소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제 2 테마도 그 존재를 주장할 만한 것은 마침네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 이해 하는데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 했다).

모짜르트의 선율의 경향을 섭취한 하이든의 거장적인 구성력을 십분 발휘한 악장이 바로 제 2악장이다. 2/4 박자의 안단테. G major의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이다. 구김살 없이 노래하는 테마를 써서 변주와 테마의 전개를 자유롭게 엮어 간다. 적절히 살려 놓은 악기의 배합이라든가 효과적인 테마의 처리는 이 악장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그리고 조용한 코다로 아쉬운 여운을 남기면서 사라지듯 끝난다.

제 3악장은 3/4박자의 알레그로. 미뉴엣 치고는 좀 힘이 넘친다는 느낌이 드는 악장. 베토벤의 초기의 스케르쪼를 연상케 하는 강한 엑센트와 리듬의 특징이 아주 매력적이다. 중간부의 트리오는 실내악 같이 단순하지만 부드러운 메로디로 미뉴엣의 부분과 대조적인 면을 보인다. 이 악장을 들으면 화려한 귀족들의 무도회가 상상이 되며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 분위기가 든다.

제 4악장은 2/2 박자의 발랄한 알레그로. 자유로운 론도 형식이다. 론도의 테마는 그 당시에 널리 퍼진 발칸반도 지방의 민요에서 한 귀절을 빌어 온 것이라는데 (그럼 명백한 표절이 아닌가?), 이 악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맡고 있어서 단편적인 다른 요소는 문자 그대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하이든은 민요의 선율을 빌어다가 약간 손질을 해서 음악적으로 세련 되었으면서도 소박한 민요의 생명력을 살린 테마가 참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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