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예배 시간때에 “잊혀진 가방”이라는 다큐멘타리를 시청 했다.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선교사로 파견 된 사람들의 애기이다. 제목 그대로 다 거기서 거기인 내용이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좀더 풀어서 애기를 하면 대중들이 흔히 인식하고 있는 외지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노고와 고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 된 다큐멘타리였다.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기대 했던 것도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일차원적 반응은 감정적인 사고에서 파생된 눈물이다. 외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에 대한 동정과 호주라는 나라에서 좋은 환경에서 편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한 죄책감이고, 또 선교사님을 돕지 않고 우리들만의 삶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이기적인 사고와 마음이 죄책감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들었을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감정적인 반응의 시작과 끝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타리를 보고 몇몇의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언제 아프리카의 콩고 같은 나라로 선교를 가실 건가요?” 그래서 나의 반응은 바로 “미쳤습니까? 제가 선교지로 왜 파송 됩니까?” 내 반응은 두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한가지는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험한 길을 선택하지 않고 편한 길을 고집한다’와 다른 한가지는 ‘선교지에 직접 나가는 것보다 선교사를 뒤에서 후원하는 일에 더 적합하다’라는 해석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후자쪽의 해석을 했을 것이다.
집으로 오늘 길에 몇가지가 생각이 났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동정하고 또 존경한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 더 많은 부를 축척하는 자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왜곡된 시각으로 그들을 극단적으로 경멸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둘다 가치가 있는 일이 분명한데… 청담동 앨리스에 나온 대사가 생각이 났다. 신팀장과 한세경이 모든 일이 발각 된 후에 타미홍 사무실에서 나눈 애기다. ‘돈 없고 가난한 자가 부자를 사랑하면 꽃뱀이고 돈 많고 부자가 다른 부자를 사랑하면 사랑이라고’. 결국엔 관점의 차이다. 관점의 차이에서 일어난 다른 해석에 대해 내 자신을 굳이 변호 할 필요도 변명 할 필요도 책임도 의무도 없다.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자기가 지향하는 삶의 스타일과 다르다. 감동을 주는 다큐멘타리를 보고 울지 않는 사람과 우는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감정이 매말랐다거나 머리속에 든것이 많다거나를 애기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보고 감정에 치우져 일차원적 생각에서 끝나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에 치우치기전에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내가 현재 진행중인 일들을 검토하고 미래 계획을 체크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남들이 다 울때 울지 않고 내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를 했다.
내 머리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일이 말하기도 귀찮고 설명할 에너지도 없다. 그냥 내 말을 face value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숨은 뜻이 내포 되어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해줄 사람들이 내 주의에 없는 것이… 아쉽지도 않고 그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 되지도 않는다. 원래 꿈은 다른 사람들과 함부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내 꿈을 이해 할 만한 스케일을 가진자라면 그런 자와 꿈을 나누고 싶다 (기린아 포함). 그런 사람들에게 오해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굳의 내 입장을 위에 적은것 같이 구구절절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