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신뢰는 어떻게 쌓이는지 한번 되 짚어 본다. 신뢰를 쌓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위기가 닥쳤을때 논리적으로 상황 판단 잘 않되는 순간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대가를 원하되 말하진 않는다) 묵묵히 같이 옆에서 돕는 것이다. 그러면 도움을 받은 사람은 ‘은혜’를 입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은혜를 입은 자는 도움을 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묘한 영특함/간악함이 들어 난다.
‘은혜’라는 말.. 단어 자체는 정말 우와하고 멋있다. 정말 성인군자들에게 어울리는 말 같지만 사실 은혜라는 것 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은혜를 입은 자는 기억력이 짧다. 다시 말해 자기가 받은 은혜를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예가 정말 허다해서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내 주의에도 많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잊어 버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고 바로 ‘은혜를 기억 한다’는 것이 그에겐 ‘족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면 ‘죄책감’으로도 바뀌며 도움을 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약간만 어긋나도 자신이 이용 당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도움을 준 쪽에서 은혜를 입은 댓가로 무엇을 요구 할 경우). 그래서 이런 족쇠 혹은 죄책감에서 벗어 나고자 될수 있으면 은혜를 빨리 갚아 버린다. 왜 그러냐고? 은혜를 빚의 일종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입었는데 빨리 갚지 않으면 사채 이자 같이 되어서 점점 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들은 은혜에 경제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접목 시키고 ‘은혜’ = ‘빚’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우리는 자유경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면서 이해타산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 그럼 도움을 준 사람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다. 난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은 믿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다. 도움을 주되 이런 이유와 동기를 정확하게 표명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단 한가지 –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자기가 이 순간 ‘희생’ (투자)를 함으로 미래에 나에게 돌아올 것이 무엇인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고등 교육을 받고 자유경제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사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만약 우리가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을 품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 할수 있다면 길거리 노숙자는 한명도 없어야 되면 탈선된 청소년도 없고 범죄도 없고 살인도 없어야 된다. 이런 이상주의는 자유경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도움을 준 사람은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며 만약 자신이 기대 한것에 비교해 리턴이 오지 않을 경우 그는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면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배은망덕한 인간으로 그를 취급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도움을 준 사람을 상습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로 ‘죄책감’을 사용해서…..
8년동안의 직장 생활에선 난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적절한 수준에서 잘 갚아 나가고 있기 때문에 서로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사이가 사이 좋게 존속이 된 것이 객관적인 해석인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넘어가자. 차가운 맥주가 갑자기 한모금 마시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