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않좋은 일이 있다고 애기하면 반사적 표현으로 ‘기도해 드릴께요’가 백발백중 나온다. 그렇게 반응이 나오면 그냥 시큰둥하다. 왜냐하면 나에겐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통상적인 접대용 멘트이니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러함으로 내가 존경하는 일부 특별 계층의 사람들은 나에게 이 지극히 평범한 접대용 멘트 ‘기도해 드릴께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기독교인들이다. 그럼 그들의 신앙심의 깊이가 얕고 성숙도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그건을 아니다. 이들은 능력 있는 자의 심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풀어 설명을 하면 이렇다.
나같이 많은 경험을 해보고 상대적으로 비교해 사회적 진출이 빠른 사람일 경우 일과 관련된 문제로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면 바로 ‘자기 계획 되로 일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이 진행 되는 과정중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이 만약 자기 능력안에 조정이 되는 부하직원들이라면 좀처럼 화를 내지 않지만 만약 내 능력 밖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면 종종 화를 내게 된다. 이러는 순간 난 감정 적이 된다. 그러면서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고 문제를 대처할 방법과 방향 제시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가 된다. 이런 순간에 내가 필요한 것은 ‘기도해 드릴께요’가 아니라 ‘내게 문제점을 한번 애기해봐. 들어줄께.’라는 대답이다. 이 대답이 어째서 ‘기도해 드릴게요’ 보다 더 효과적이냐고? 멍청하긴…
난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다. 일은 순서와 서열이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고 과정이 있고 목표가 있다. 이런것을 하나 둘씩 실마리를 풀어 나갈려면 가끔식 내가 해온 과정과 앞으로 해야 될일들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 남에게 이것을 구두로 애기하는 과정 중에 나도 모르게 잘못된점을 찾아 낼수가 있으며 보안점과 수정안을 찾아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쓴 글을 내 자신이 듣게 소리내어 읽음으로 해서 내가 쓴 글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독백의 효과이다. ‘내게 애기 해봐’라고 말하는 자들이 본질적인 의도는 내 애기를 듣고 해결책을 찾아 주기 보다는 내가 내 자신에게 스스로 애기함을 통해서 내 스스로 문제점을 찾게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기도해 드릴께요’라는 접대용 멘트는 나에게 결코 효과적이지 않다.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라는 심리학 책이 있다. 남들이 고민을 애기하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불만을 표현 그리고 동정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이 심란하고 이러하니 네가 내 애기를 듣고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냥 내 편좀 들어주어라’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에게 ‘기도해 드릴께요’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답변이 아닐까? 아니면 이것이 기독교 version의 “I don’t care”를 좀더 듣기 좋게 표현한 것일까?
누가 나에게 이런 애길 했다. ‘너무 힘들어요. 뒤에서 수근 거리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다. ‘그 새끼들 누굽니까? 내가 인천 앞바다 썰물 일때 10미터 파서 뭍어 버릴까요? 그럼 시체도 못 찾을텐데’. 이것이 기독교적인 대답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전에 이 질문을 먼저 해보자. 대화는 쌍방 통행이다. 상대편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에 합당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동정이라면 동정의 한표를 던져 보자. 쓸데 없이 중립적인 입장을 고집하면서 ‘기도해 드릴께요’라는 미사여구 난발하지 말자. 이 말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보자 ‘기도 진짜 합니까? 자기 말에 책임 지십니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