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재수가 없다.
또 같은 애기를 하게 된다. 대학 4서 5경에 보면 겸손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서양의 10대 경영 철학에서 된 ‘겸손’의 정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내린 정의와 정말 다르다. 통상적인 기독교적 ‘겸손’은 바로 ‘알아도 모르는 척,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척,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척, 의견이 있어도 침묵을 지키는 것을 예로 들어 ‘겸손’을 설명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밣히고, 자신의 능력을 공개화 시키면 이런 자를 교만하다로 평을 내린다. 좀더 까놓고 애기하면 직설법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자를 교만하다라고 흔히 애기 한다. 이런것을 보고 나의 반응은 딱 한가지… 놀고 있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자신감이 넘친다. 그 사람이 왜 자신감이 넘칠까?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고 경험해 보아서? 물론 이런 이유들이 포함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감에 넘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자기가 한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질수 있는 능력과 자세 및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할수 있는데 왜 할수 있다고 애기 하지 않는가?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람 엿먹이는 행위다. 마지못해서 떠 맏아서 전 못해요 라고 사양 하는 척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겁한 책임 회피 방법중에 한가지이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즉 다시 말해 자기가 한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회피 하는 자는 겸손한 것이 아니고 비겁한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밣히지 못하고 속에 담아 둔후에 나중에 뒷북치는 것이 정말 겸손하자의 행실인가? 말하고 싶은것 애기를 꼭 해야 될것을 하지 못하면서 ‘겸손한 자의 연단’이라는 추상적인 미사여구에 왜 비겁한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항상 이분법적 사고가 올바른 것이라고 말할순 없지만 타협을 내포한 이분법적 사고는 논리적인 추리와 해결책을 제시할 기회를 제공한다. 정확한 상황 판단과 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삥돌아가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 것 보다 직설적으로 A에서 B로 곧장 가는 직선적 사고를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상처 입은 불쌍한 기독교인들은 직설적인 사고와 이분법적 대답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사실을 용감하게 직면할 용기와 배짱이 없고 상대편이 인위적으로 항상 따뜻하게 좋은 말만 해주길 바라는 경향이 허다하다. 이런게 가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꼭 알아야 될 애기가 아닌 듣고 싶어하는 애기를 해주는 사람을 가까이 지내면서 ‘형제’ 혹은 ‘자매’라는 단어 아래 자신들만의 그룹을 결속 시킨다. 그러면서 보호 받기를 원하고 어느 한 단체에 뭍힘으로 파생된 소속감으로 자신의 위로한다.
난 이렇게 비겁하게 살지 않는다. 난 나보다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가진 자가 나의 잘못된 점을 직설적으로 지적해 주어서 나의 잘못된 점을 깨우쳐 준다면 논리적으로 타당성 있게 깨우쳐 준다면 난 받아 들인다. 그런데 막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한테 설교(?)를 하려 든다던지 나를 대신 해서 짧은 식견과 경험을 통해서 나에게 실행 방안을 건방지게 제시하여 선택하게 하는 행위는 좀 자중해야 될것이다. 이제 인생 30년 정도를 살았으면 상대편의 스타일을 파악하고 그것에 자신을 맞추는 권모술수 정도는 능히 익혀야 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무슨 생각으로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밤은 그냥 화가 많이 나는 밤이다. 자기전에 음악을 두시간 정도 듣고 자야 겠다. 이상하게도 오늘 밤은 우월감과 권위적인 소리가 내포된 음악을 듣고 싶다. 그럼 당연히 국민악파 음악이지. 오늘 밤은 Finland로 가서 장 시벨리우스를 만나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