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목요찬양 집회에 참석 했다. 두달간 준비한 연극 ‘미소의 호주 방랑기’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교회에서 이런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에는 바빠도 참석한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주는 미덕이라고나 할까?
프로들이 아니고 아마추어 들이니 당연히 질적으로나 기술적인 부분이나 많은 것이 부족 했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래도 연극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관객들에게 제대로 비추어진것은 같다. 스토리 라인 자체가 지나치게 나에겐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마도 워킹할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시드니에서 격는 고통(?)들을 소재로 하여 좀더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 가길 원했던 것 같다. 그냥 놀라운 것은 극중에 표출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우리의 현실이라는것을 생각하니 참 썩을데로 썩은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중에서 ‘겸손’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착실하고 성실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들어낸다. 순간 자본주의 사회관점으로 ‘착하다’의 정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의 이미지는 ‘남에게 쉽게 이용 당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나의 뜻데로 좌지우지 할수 있는 상대, 내가 상대 하기 어렵지 않은 상대, 내가 말하는 것을 반격하지 않고 수긍하는 상대, 내가 말하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 상대를 우린 흔히 ‘착하다’라고 표현을 한다. (나만 그런가?) 쉽게 말해서 착하다는 표현은 넌 쉽게 이용 당하는 어리석인 자이다를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꾸며 놓은 미사여구가 아닐까?
난 여태껏 착하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영특하다 혹은 영악하다 아니면 정의롭다 라는 말은 자주 들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꾿꾿하게 전진하는 그런 미래지향적 사고를 가진 영웅을 보고 우린 착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성장하고 개발하고 전진하는 과정중에서 그의 인생 철학과 의지 및 대의가 분명이 들어 날때, 그리고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때 우린 결코 착하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럼 착하다의 정의는 정말 무엇일까? 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것은 착하다는 표현은 나에게 칭찬이 아닌 최악의 욕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착하면 성공을 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