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에 WordPress app을 설치 했다. 굳이 집에서 컴퓨터에 앉아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것 보다 기억 나는데로 생각나는 데로 느끼는 데로 그냥 그 자리에서 쓰기 위해서이다. 컴퓨터 앞에 정식으로 앉으면 아무래도 문장 구성과 단어 선정등에 약간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즉 그러는 과정중 내 사상이 필터가 되고 언어 순화가 일어나며 가방끈을 일부러 늘리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 진실성을 상실한 글이 된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을 찾았다. 내 블로그의 조회수를 기록한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2011년 7월달에 내 블로그 조회수가 820번을 넘었다. 아니 누가 내 두서 없이 정리 않된 글들을 읽어 보는지 그들이 누군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할껏 같은가? 아니. 전혀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남을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내 자신만을 위해서 쓴 글들이니까 누가 읽던 무슨 생각을 하던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 이런 자세를 뭐라고 하더라. 평범한 표현으로는 ‘I don’t give a toss’이지만 그 단어가 무었인던가… apathetic이 맞나?
요즈음 특히 오늘 머리속이 아주 많이 복잡해서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난다. 그중에서 봉사, 헌신, 후원, 기부등의 정의에 대해서 정리를 했다. (요즈음 현대 사회의 흐름을 역류 할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지도층의 모습을 각종 서적에서 추출하여 가장 idealistic한 모습을 artificially constructing하고 있는 중이다.) 그중 ‘social responsibility’라는 항목 아래 사회에 어떻게 환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정리 중이다. 두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의 존재성을 억지로 숨기는 것이고 하나는 자신의 존재성을 alpha를 하나 더 더해서 자신의 가치를 부각 시키고자 한다. 인간이 악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고집한다는 전제 아래 이 두가지는 시작이 달라도 하나의 지점에 도달한다. 바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그 방법론이 중요하다.
가장 흔히 쓰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롤 모델이 되어서 자신의 성공기를 기록하고 많은 사람들의 이상적인 멘토가 된다는 배너 아래, 그리고 인재를 발굴 및 양육 한다는 목적을 빌미로 세미나, 콘퍼런스, 혹은 워크샵, 종교 단체에서는 집회를 하기도 한다. 특히 종교 단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룩한 슬로건을 내 걸고 자신이 이루어 낸 모든 결과가 자기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데로 되었다고 애기한다. 여기서 나의 아주 typical한 반응은 바로 이것이다.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일 뿐이라고. (또 애기가 이상하게 딴 곳으로 흐르네)
빈 수레는 아주 요란 하다고 했다. 거기에다가 알파를 더해서 자신이 본 모습이 아닌 좀 더 부풀려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들어내는 3류 수단 보다는 자기 보다 낮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들에게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으면서 자신에 대한 소문과 명성이 넓게 펴지길 은근히 바란다. 여기서 고단수는 ‘겸손’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또 사용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비밀이라고 말하고 시작하면 소문이 더 빨리 퍼진다. 알리지 말라면 떠 빨리 퍼진다. 사람들을 숫자를 나름데로 반올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알리지 마세요’는 ‘그냥 은글 슬쩍 알려주세요’라는 겸손을 가장한 표현일 뿐이다.
너무 비관적인가? 흠… 현대인들은 사실 (단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관용이 부족하다 덕이 없다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들 마음데로 해석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산물들… 왕짜증) 어쨋든 내가 추구하는 social responsibility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실행하는자의 모습은 바로 ‘그냥 있는 그대로.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너무 쉬운가? 나한테는 쉬운데. 여포가 쓰던 방천화극을 초선의 몸을 감싸던 비단으로 아무리 감고 감아도 날카로운 창의 끝은 언젠가는 나오는 법이다. 즉 굳이 감출 필요도 없고 굳이 알파를 더 해서 내 자신을 높일 이유도 전혀 없다. 후원을 하는 동기를 정확히 밣히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밣힌다.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해타산과 수지가 맞아야 한다. 일을 주면 일을 받고 열을 주면 열을 받는다. 조건 없는 희생이라는 센티멘텔한 테마에 젖어 있다면 스스로 소매를 걷어 붙히고 자신이 하던 일 다 내려 놓고 인디아에 가서 노예로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그들을 해방 시켜야 할것이다. 내리 사랑, 조건 없는 사랑, 겸손한 헌신 이런 말도 않되는 abstract noun들을 앞에 슬로건 같이 내걸고 정작 commercial한 마인드가 아닌것 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주 쌔빨간 거짓말이다.
누구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인과응보란 말이 있다. 뭐는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다시 애기하면 자본주의 관점에서 무언가를 제공하는 무언가를 다시 받기를 원한다. 만약 이것을 절대적으로 부정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상적인 대의를 겉에 내걸고 상업적 가치 평가기준을 non-tangible / non-monetary value에 맞춘다는 것은…. 이것은 겸손도 헌신도 봉사도 후원도 아닌 완전 사기이다.
난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대인 관계를 맺는 일, 나에겐 다 목적이 있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이들,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 모두 그들에게는 나에게 말하지 않는 hidden objective가 있다. 난 이런 사람이 좋다. ‘서로 돕고 살자’라는 말. 이것을 적나라게 풀어 쓰면 네가 나한테 열을 주면 나도 너에게 열을 주겠다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equilibrium이다. 수요와 공급의 최고의 밸런스를 이루는 이 시점. 너무 주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고 너무 받기만 하는 자는 짠돌이고 구두쇠다. 주는 것은 받고 주어야 될것은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 한 순간 이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병의 맥주를 마신 순간 나의 부정은 소용 없는 한 어리석은 자의 힘없는 절규 였을 뿐이다. 이럴 시간 있을때 그냥… 책이다 더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