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가 어느 교회 집사래 그리고 또 아무개는 어느 교회의 장로래’…. 기독교인들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난 시드니 주안 교회 서리집사로 소개 받고 싶지 않다. 난 조후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 받고 싶다. 나의 이름안에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이루었는지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집사’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집사라는 감투 아래에 나에 진정한 칼라가 희석 되기 때문이며 나의 정체성이 왜곡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써의 성실함, 자상함, 온화함, 그리고 사랑과 관용 및 자비와 은혜로써 사람들을 대하고 만인을 품을 만한 포용력을 가진 자로 인식이 되면 좋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난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집사’라는 타이틀안에는 위에 나열한 이런 인위적 이미지가 저절로 생성된다.
난 성실하다. 자상하진 않다. 온화한 것보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하다. 사랑은 경영에 필요한 한 도구로 인식 할때도 있다. 자비는 은혜를 알고 빚을 갚을수 있는 의리 있는 자에게만 배푸는 특권이며, 만인을 품지 않고 내 인생에 필요한 인재들만 추출하여 교육하고 내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나이며 이것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런 나의 모습이 ‘집사’라는 타이틀 아래 아름답게 성스럽게 가식적으로 포장 되고 싶지 않다.
이래서 난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코드가 맞지 않는 다는 말을 한것이다. 서로의 개성과 배경, 학벌, 명예, 세계관, 인맥, 경제력, 취미, 특기, 개성, 성격등이 모든 다른데 어찌 ‘기독교’인 이라는 종교인의 명목아래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돕고 이해하려 드는지 이해가 않된다. 그러면서 융화 되지 않는 나를 보고 날라리 성도라는 우산 아래에 가려 버린다.
결국은 기독교인 이라고 다 서로가 사랑하고 이해하고 감싸는 것이 아니다. 자기랑 이해타산 관계가 맞고 코드가 맞고 수준이 맞는 상대를 골라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다 당연한 인간의 본성임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그들을 보면 그냥 인상이 나도 모르게 써진다.